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아일랜드에서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출처: 뉴시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아일랜드에서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출처: 뉴시스)

비가노 대주교, 11쪽 공개서한 폭로 “교황, 사임해야”
교황 “한마디도 안할 것” 확인 거부 은폐의혹 불지펴
서한 ‘보혁갈등’ 촉발… “성학대피해자 권력투쟁 이용”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십 년간 은폐돼온 고위 사제들의 아동성폭력 사건들이 연일 터져 나오면서 취임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심지어 교황 자신도 성폭력 은폐의혹에 휘말리며 가톨릭의 상징인 교황의 권위마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탈리아의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77) 대주교는 최근 교황이 지난 2013년부터 시어도어 매캐릭 전 미국 추기경의 성범죄를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보혁 갈등을 촉발시켰다.

워싱턴포스트(WP), CNN 등 외신은 ‘교황 사임’ 문제가 불거지면서 가톨릭 내 보수, 온건 세력이 분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28일 보도했다. 미국 주재 교황청 대사를 지낸 비가노 대주교는 지난 26일(현지시간) 가톨릭 보수 매체들에 11쪽 분량의 서한을 보내 자신이 2013년 교황에게 시어도어 매캐릭 전 추기경의 잇단 성학대 의혹에 관해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비가노 대주교는 11쪽짜리 공개서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범죄 의혹을 알고도 은폐했다며 교황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서한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재임 당시 소년 성학대 의혹을 받고 있던 매캐릭 추기경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 제재를 거뒀고 명예도 회복시켜줬다”고 했다. 교황이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매캐릭 추기경을 처벌하는 대신 그를 복권시켜 미국 주교 선발권을 허용하기까지 했다는 설명이다.

비가노 대주교는 “교황은 즉위 후 교회의 투명성을 누구보다 강조해 왔다”며 “이 문제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천명해온 그는 매캐릭의 학대를 은폐한 추기경과 주교들에 대해 선례를 보여야 하며, 그들 모두와 함께 사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격을 당한 교황은 즉답을 피해 성범죄 은폐 의혹 논란에 불을 지폈다. 지난 25~26일 아일랜드 방문을 마치고 교황청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황은 전용기 안에서 기자들이 비가노 대주교 서한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의에 “한마디도 안할 것”이라고 확인을 거부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로베르토 데 마테이 레판토 재단 이사장은 “비가노 대주교의 공개서한이 교황 사임을 기다려온 가톨릭 내 보수 세력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했다.

더욱 커지는 은폐 논란에도 교황은 퇴위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간 일 메사제로, ANSA 통신 등 이탈리아 언론은 29일 교황의 측근들을 인용해 “퇴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비가노 대주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상황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비가노 대주교가 의혹 제기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며 이번 갈등이 가톨릭 보혁 갈등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풀이했다.

BBC는 비가노 대주교의 폭로가 공교롭게도 교황이 아일랜드를 방문해 아동성폭력을 거듭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시점에 이뤄졌다고 지적하며 “이는 교황이 가톨릭 고위층 내부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조직적인 공격에 처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고 보도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전에도 진보 성향을 보이는 교황의 행보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었다. 교황은 거리에서 즉흥적으로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거나,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의 혼배 성사를 집전하는 등 전통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 이혼한 사람에게도 성체 성사를 받는 길을 열어놓은 교황의 가르침에 가톨릭 보수파 추기경 4명은 공개적으로 우려를 내비치며 반기를 들기도 했다. 서구 사회에서 큰 이슈 중 하나인 동성애와 이혼 등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입장을 보이는 교황의 행보에 가톨릭 보수 인사들은 교리를 훼손하고, 가톨릭 신앙의 미래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것으로 보고 강하게 반대해 왔다.

보혁 갈등으로 번지는 이번 논란을 바라보는 피해자들은 우려를 숨기지 않고 있다. 성학대를 받은 한 피해자는 NYT에 “아동 성학대 위기와 피해자들을 권력 투쟁의 지렛대로 이용하려는 쿠리아(교황청 관료조직) 내부의 집안싸움”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아동 성학대 위기의 본질은 주교가 진보주의자냐 보수주의자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동 보호와 관련한 것”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성폭력 은폐 문화를 최초로 드러냈다. 또한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사과하고 변화와 개혁을 약속했다. 이러한 평가에도 사임 압력까지 받는 교황이 자신에게 제기된 은폐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더 큰 상처와 논란을 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나아가 가톨릭교회 내 뿌리 깊이 박힌 사제들의 악행을 멈추기 위해선 교황의 결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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