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영월 장릉(莊陵)을 나오면서 ‘장릉의 유래’ 안내판과 ‘박충원 낙촌비각’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중종 11년(1516) 노산 묘’에 관한 설명이 각기 다름을 발견했다.    

먼저 ‘장릉의 유래’ 안내판부터 살펴보자.   

-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대왕의 능이다. (중략)

중종 11년(1516) 노산 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 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 묘를 찾고 수축봉제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 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되었다. (후략) -

다음은 ‘박충원 낙촌비각’ 안내판이다.  

-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 됨을 알리기 위하여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중략) 중종 11년(1516)에 노산군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 -
두 안내판의 설명이 다르다. ‘장릉의 유래’ 안내판은 1516년에 노산 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노산 묘는 못 찾은 것으로 해석되고, ‘박충원 낙촌비각’ 안내판은 1516년에 노산 묘를 찾아 치제(致祭)하였으나, 그 후 방치된 것으로 해석된다.   

어느 안내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뒤졌다. 그랬더니  중종 11년(1516) 11월 22일에 중종은 “노산의 묘소에 관원을 보내 치제한 다음, 분묘를 수축하도록 하라”고 전교했고, 1516년 12월 10일에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의 묘에 치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1516년 12월 10일자 실록에는 사신의 논평이 있다. 

-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승지를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써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별세하셨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게 여긴다’ 하였다. -

이를 보면 중종 11년(1516년)에 승지 신상이 노산 묘를 찾아 치제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박충원 낙촌비각’ 안내판이 정확하고 ‘장릉의 유래’ 안내판은 수정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또 든다. 1516년 이후 노산군의 묘가 왜 25년 동안이나 방치됐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단서가 하나 있다. 1539년 윤 7월 5일에 한산군수 이약빙이 노산과 연산의 묘소를 복원하고 후사 세우기를 상소했으나, 대신들이 간사한 의논을 꺼냈다하여 죄주기를 청했다. (중종실록 1539년 윤 7월 5일∼7월 13일) 이랬으니 25년간이나 노산 묘가 방치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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