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강원도 영월 장릉(莊陵)을 답사했다. 높은 언덕 위에 비운의 왕 단종은 외롭게 누워있다. 한(恨) 많은 귀촉도(歸蜀道) 한마리가 슬피 울고 있다. 난간석과 무인석도 없고, 도성에서 100여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왕릉 조성 규정도 적용되지 않았다. 장릉은 원래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암장(暗葬)한 자리였기에 그랬으리라.     

1457년(세조 3년) 10월 24일 단종의 시신은 영월 동강에 흘렸으나,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시신을 거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흥도가 감히 나섰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은 것은 달게 받겠다(僞善被禍 吾所甘心)”는 충정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  

엄흥도는 날이 어두워지자 아들 3형제와 함께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으로 향했다. 초겨울이라 산에는 함박눈이 쌓였고,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어왔다. 엄흥도는 잠깐 쉴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노루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쳤다. 그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엄흥도는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더 깊은 골짜기로 나섰으나 관이 얹혀 있는 지게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노루가 앉아 있던 자리에다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장사지냈다. 이곳이 장릉(獐陵)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1458년에 엄흥도는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 등과 함께 초혼제를 드린 후 종적을 감추었다 한다.

엄흥도가 단종을 암장하고 사라진 지 59년이 되는 중종 11년(1516년)에 노산군의 묘에 치제했으나(중종실록 1516년 12월 10일), 그 후 25년간 방치됐다. 

1541년에 박충원(1507∼1581)이 영월군수로 부임했다. 이때에 전임 군수 3명이 부임 첫날밤에 갑자기 죽어 민심이 흉흉했다. 

부임 첫날밤에 박충원은 의관을 정제한 채 동헌에 불을 밝혔는데, 과연  혼령이 나타났다. 박충원은 침착하게 혼령이 단종임을 알아보고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이시나이까?”라고 물으니 단종은 자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면 큰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박충원은 관속들을 풀어 엄흥도의 친척을 찾아냈다. 그리고 동을지산으로 가서 가시넝쿨에 쌓인 묘를 찾아내어 봉축하고 제를 지냈다. 

제문은 이렇다. “왕실의 맏이요, 어리신 임금이시여,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 청산에 만고의 고혼(孤魂)으로 누워계시나이다. 바라건대 강림하시어 제수를 흠향하소서.” (연려실기술, 단종 조 고사 본말)    

1681년에 이르러 노산군은 노산대군으로 추봉됐고,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이 되고, 능호는 장릉이라 했다.  

장릉을 내려와서 홍살문을 지나니 ‘엄흥도 정려각’이 있다.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정려비 위 편액에는 ‘조선충신 영월부 호장, 증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엄흥도 지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장릉 입구에는 ‘낙촌비각’이 있다. 이 비각은 박충원의 충신됨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1973년에 세운 것이다. 

한편 2007년부터 영월군은 단종문화제 때 단종 국장(國葬)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영월 장릉은 아픈 역사이다.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조카도 동생도 죽이고 쟁취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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