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여행은 때로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일본 북해도 여행을 했다. 

노보리 베쓰(登別) 지옥계곡을 구경하고 나서 주차장 앞에서 ‘포정의 무덤(庖丁塚)’을 보았다. 사진을 여러 장 찍으면서 ‘일본은 소나 돼지를 잡는 일을 하는 도축인도 추앙받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백정(白丁)을 천민으로 여겨왔는데.  

포정해우(庖丁解牛)란 고사성어도 생각났다.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 나온다. 중국 전국 시대에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그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소의 뼈와 살을 발라냈다. 문혜군이 감탄하여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저는 도(道)를 좋아합니다. 기술보다 앞서는 것이지요.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소의 몸뚱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이제 저는 소를 잡을 때 영혼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중략) 보통 소 잡이는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백정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꿉니다. 힘줄과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 지났는데도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귀국해 일본에서 본 포정총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니 포정이 소 잡이가 아니다. ‘포정총’이라고 적힌 곳 오른편에는 ‘어조채공양지비(漁鳥菜供養之碑)’라고 적혀있고, 별도로 비문(碑文)이 있다. 일본어로 된 비문을 더듬더듬 읽었다. 

“포정은 고래(古來)로 식물(食物)을 분배하고 조리하는 요리인으로서, 생선이나 새를 해체하는 칼에는 신비한 힘이 들어있다. 

특히 포정은 섬세하고 다채로운 미각을 가진 일본요리의 창조를 지금에 전하는 선구자였다. 이에 포정의 혼을 숭경(崇敬)하기 위하여 포정총에 어조채(漁鳥菜)를 공양(供養)한다. 

노보리 베쓰 온천 조리사회(調理師會)가 이 비를 세우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비문에 ‘육(肉)’이라는 단어가 안 적혀있다. 왜 그럴까? 이는 675년에 덴무(天武) 천황이 살생과 육식금지령을 선포해 1200년 동안 소나 말 등을 안 먹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불교국가라는 종교적인 이유와 함께 소는 농업에, 말은 군사용으로 필요했기에 육식을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1868년의 메이지(明治)유신으로 요리 혁명이 일어났다. 일본정부는 왜소(矮小)한 일본인의 체력향상을 위해 1871년 12월에 ‘육식해금령(肉食解禁令)’을 내렸고, 1872년 1월 24일에는 메이지 천황이 직접 대신들과 함께 소고기를 먹었다. 

이로부터 한 달쯤 되는 2월 18일에 열 명의 자객이 천황 거처에 난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4명은 현장에서 사망, 1명은 중상, 나머지 5명은 생포됐는데 범행동기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천황이 소고기를 먹어 일본정신을 더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천년의 전통을 일시에 팽개치고 외세에 눌려 육식을 하여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양요리는 대세였다. 소고기 전골, 돈가스로 인해 일본 식탁은 더욱 풍성해졌다.   

요컨대, 일본에서 포정(庖丁)이란 중국이나 한국처럼 도축인(屠畜人)이 아니다. 일본어로 포정은 ‘식칼 또는 요리’를 뜻한다. 한자가 똑같다고 하여 역사와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다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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