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부여와 청양은 백마강으로 운명이 갈렸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고도 부여에 반해 청양은 칠갑산, 콩밭 매는 아낙네의 한 서린 가요로 산간 두메 인상을 받아 왔다. 그러나 청양은 지금 청정한 자연이 각광받고 있으며, 지난 80~90년대부터 숨겨진 백제 유적들이 기적적으로 햇빛을 찾고 있다.

한국 역사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백제 가마터가 찾아진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가마터는 현재까지 모두 다섯 곳이나 조사됐다.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가마터는 왕도 귀족들이 썼던 고급스런 토기들과 건축물을 지을 때 얹은 와당을 생산한 공방이다. 청양군 정산면 학암리, 청남면 왕진리, 장평면 분향리, 관현리, 목면 본의리 등이 그곳이다.

목면 봉의리 가마터에서 찾아진 불상의 토제 좌대는 지금까지 발견된 연화좌대로는 가장 크다. 본체는 없어졌지만 좌대만으로도 얼마나 큰 불상이 만들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왕진리 가마터는 백마강 변에 자리 잡고 있다. ‘왕진(王津)’이란 백제왕들이 건너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가. 이곳에서 출토된 백제 와당은 사비기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다.

청양에서 생산된 와당을 배로 실어 왕성으로 운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강 건너 왕궁지,  정림사지, 가증리 절터 등에서 이와 똑같은 연화문 와당이 출토된 바 있다. 부여에서 발견 된 가마터의 수효보다 청양 유적이 훨씬 많다.

칠갑산은 백제인들이 매우 신성시한 산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법왕 때 임금이 직접 나가 칠악사(漆岳寺)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칠악은 칠갑산으로 비정되고 있다. 강희자전에 보면 칠(漆)은 숫자의 칠(七)로도 쓸 수 있다고 나온다. 중국의 좌상(佐相. 한어 대사전) 묵자(墨子)의 귀의(贵义)라는 글에도 ‘漆’을 숫자인 ‘七’로 썼다.

칠악산이 왜 지금의 칠갑산으로 변한 것일까. ‘漆’자를 ‘七’로 쓴 것은 일곱 칠이 천지만물이 생성한다는 ‘칠원성군(七元星君)’ 또는 ‘칠성(七星)’과도 같은 風, 水, 和, 火, 見, 識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갑(甲)’자는 천체 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六十甲子)에서 연유됐다. 백제 사찰 칠악사지를 찾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칠갑산에는 도솔성(兜率城)이라고 불리는 성터가 있다. 이 성은 험준한 칠갑산 정상에서 마재~적곡리~천장리를 감싼 매우 큰 성지다. ‘도솔’이란 불가에서 민중의 희망인 미래불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이 성지는 왕도 부여가 나당연합군에게 함몰된 후 유민들이 대오를 정비해 처절하게 저항했던 마지막 왕성 주류성(周留城)으로도 비정된다. 주류성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필자는 고 기록을 충족하는 칠갑산 도솔성지가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 주류성에서는 풍왕이 이끄는 복국군이 3년간 웅거하며 나당 연합군과 처절하게 싸웠다. 그러나 2차 백제 정벌에 나선 당나라 40만대군과 신라연합군에게 백강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패전하자 주류성도 함께 무너졌다.

부여에서 멀지 않은 첩첩한 산중이며, 공격이 어렵다는 일본서기(州柔)에 대한 기록을 감안할 때 가장 유력한 곳으로 보는 것이다. 필자도 칠갑산 주류성을 규명하는 조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토루(土壘)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적곡리 속칭 형제봉(성재봉)을 답사할 계획이다. 이미 백제 복국전쟁 유적으로 확인된 정산 두량윤성, 우산성도 중요한 백제 항쟁 유적이다.

공주 부여 익산이 백제 고도문화권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바로 코 밑인 강 건너 백제 유적의 보고(寶庫) 청양이 제외된 것은 여간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백제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 그리고 백제 복국운동의 거점인 예산 임존성도 중요한 백제 유적이다. 이들 지역도 백제 고도문화권역으로 지정돼 세계문화유산에 추가 등재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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