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우리 민족은 매년 이맘때면 하늘에 제사하고 풍년을 노래하는 축제를 열었다. 바로 농악이었다. 농악은 겨레의 신명나는 전통 음악이었으며,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현재는 그 예술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농악을 하며 살았을까. 학자들은 중국사서인 삼국지 후한서, 위지 동이전에 기록돼 있는 고구려 동맹, 동예의 무천 등을 농악의 원류로 생각한다, 농사철이 시작되는 시기부터 결실기인 10월, 천신에 제사지낸 후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고 밤새 놀았다. 그 역사가 2천년이 넘는다고 할 수 있다.

강원도 도청소재지 춘천은 고대 맥국(貊國)의 도읍지다. 맥국은 2천년 전 소양강가에 자리 잡은 고대 부족국가였다. 학자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에 나오는 ‘맥국’이라는 기록과 백제, 고구려와의 관계, 설화를 토대로 삼국기 초기에서 약 4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정 세력을 구축했던 국가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글마루 취재단에 의해 소양강변 우두산에서 고대의 유적이 새롭게 확인됐다. 삼국기 초기 고대 판축성의 예를 보이고 있는 우두성 정상에는 현재 충렬탑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고대 토기편과 와편 등이 산란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토성은 경기도 안성 백제 초기 마한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는 도기동 유적과 비교된다. 우두산성을 고대 맥국의 제단이자 치소(治所)로 확인한 것이다.

이곳은 낙랑을 위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차지했었으며 신라시대 이르러 불교유적이 자리 잡았음이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 기와 가운데는 백제, 신라계의 고식(古式) 와편도 수습할 수 있다. 재미난 것은 기와 가운데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범자문(梵字紋) 평기와다. 이는 우두산 정상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우두사(牛頭寺)’는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 기록이 나오며 조선 중기까지 존속됐음을 알려준다. 이 책의 춘천 명승을 칭송한 제영(題詠)조에도 ‘춘천의 고적은 우두산에 있다’는 기록이 보여 우두산이 오래 된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읍지인 춘주지(春州誌)에 주목되는 기록이 있다. ‘우두사를 지을 때 지내촌에서 밤새 연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牛頭寺創設時 枝內村 三聖堂 夜夜聞張樂 宴樂之聲云云)’는 내용이다. 이는 우두사 창건 공역시기 농악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전국에 존재하고 있는 농악의 역사가 조선시대를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두농악의 역사 기록은 주목된다.

강원도지역에서 농악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강릉 농악(무형문화재 11호-라호)이다. 강릉농악의 특징은 지신밟기의 사설이 길고 다양하다. 제11호-가호로 지정된 경남 진주농악은 군악적인 요소가 많고 남성적인 농악이다. 우두농악은 영서지방의 소박한 가락을 형상화 했다. 개인 놀음은 화려함은 없지만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판의 역동성이 특징이라고 한다.

특히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땅도 하나’라는 것을 표방한 삼원진, 이원진, 일원진 놀이 세 마당은 태양과 달, 땅을 숭배한 고대 제천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어 주목된다. 넷째 마당인 오방진 놀이는 군대농악의 잔영으로 매우 역동적이다. 다섯째 마당은 화합의 한마당 뒤풀이로 엮어져 있다.

고대 맥국의 제천의식은 우두산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온 마을이 농악을 치며 신명나게 춤추고 놀았을 것이다. 우두농악이야말로 가장 시원적인 농악의 원형이 아닐까.

그런데 기능 보유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팔순노인부터 중년들이 ‘우두농악 보존회’를 만들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최근 춘천농악으로 통합되어 우두라는 이름이 사라질까 하는 것이다. 민속학자들과 문화계의 의식 있는 이들은 ‘우두농악’이란 이름으로 춘천 농악의 맥이 흘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원형보존을 위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도 촉구하고 있다.

잃어버린 맥국 역사 찾기가 춘천시민의 염원이라면, 역사의 발상지인 우두산에서 태어난 우두농악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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