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이형만 선생

강원도 원주에서 전통공예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나전장 전승에 힘쓰고 있는 이형만 선생 ⓒ천지일보(뉴스천지)

가족과 함께 세계 최고의 ‘나전’ 명맥 잇다

◆ 전복·소라껍질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 ‘나전장’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나전이란 소라를 뜻하는 나(螺)와 도구로 꾸민다는 전(鈿)의 합성어로 ‘자개’라고도 한다. 즉 전복이나 소라 등의 껍질을 갈아 여러 무늬의 문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여 장식품을 만드는 공예작업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기술에 종사하는 전문적인 장인(匠人)을 나전장(螺鈿匠)이라 부른다.

나전 문양에 최종적으로 옻칠을 해서 완성하기 때문에 흔히 ‘나전칠기장’이라고도 부르지만, 지금은 문화재청에서 나전장과 칠장으로 세분화했다.

자개로 문양을 만드는 방법에는 실처럼 잘게 잘라서 백골에 붙여 직선 또는 대각선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내는 ‘끊음질’, 자개를 실톱으로 문질러서 국화·대나무·거북이 등의 문양을 만들어 백골에 붙이는 ‘줄음질’ 두 가지가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나전장 기능보유자로는 현재 ‘끊음질’의 대가 송방웅 선생과 ‘줄음질’의 대가 이형만 선생, 단 2명만 기능보유자로 등록돼 있다. 이 중 이형만 선생을 강원도 원주에서 그가 운영하고 있는 전통공예연구소에서 만났다.

◆ 45년 나전장의 길

이형만(64)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분야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45년 정도 일해 왔다고 한다. 나전장인으로 잔뼈가 굵은 나전장인 그는 경남 통영이 고향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통영이 나전칠기의 근원지다. 통영이 고향이다 보니 자연스레 이 일을 하게 됐을 법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른팔을 다친 것이 나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초등학교 졸업 직전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오른팔 골절이라는 부상을 당해 입학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당연히 중학교 입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치료를 받으면서 쉬고 있을 때 그는 경상남도에서 운영하는 기술원 양성소라는 학교를 알게 됐다. 도에서 무상으로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집안형편이 어려웠던 이 선생은 시험을 치른 후 이 학교에 들어갔다.

이 선생은 이곳에서 학과공부 외에 나전칠기도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그저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나전칠기를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당시 학교소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그의 스승인 故 김봉룡 선생이었다.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할 무렵에 그의 스승은 학교를 그만두고 개인 공방을 차렸고, 이 선생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스승은 그를 제자로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이 선생은 제대로 된 맨투맨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해를 거듭 할수록 실력도 함께 날로 성장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됐다.

▲ 이형만 선생의 작업하는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 스승에게 붙들려 계승 받아

학교를 졸업하고 2년 정도 스승과 함께 작업하면서 이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는 이 선생은 “사실 스승님을 피해 도망도 많이 다녀봤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지금까지 왔다”고 회상했다.

그는 “하다가 힘들 때면 스승님이 출타 중일 때 그냥 덮어놓고 도망갔다. 그런데 며칠 놀다가 집에 돌아와 보면 어김없이 스승님이 방 가운데 앉아 계시다가 다시 공방으로 끌고 나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스승 곁을 떠나지 않고 붙어 있었던 이 선생은 군대에 가게 됐고, 군복무 중에 스승이 원주로 이사했다는 얘길 듣고 제대 후에 잠깐 들른다는 생각으로 스승을 찾아갔다. 그러나 또 웬걸. 스승에게 바로 붙들려서 지금까지 눌러앉게 됐다.

이 선생은 1963년 출품한 이래 여러 차례 수상했고, 1988년에는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갑자기 포부가 생겨 공방독립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스승님에 비해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작업 연장선상에서 스승님과 함께 있으면서 더 여쭤보고 귀찮게 하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훌쩍 지난 것 같다”며 회상에 젖었다. 그의 스승 김봉룡 선생은 1994년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후 이 선생이 스승의 뒤를 이어받아 이곳 원주에서 전통공예 전승을 위해서 힘쓰게 된 것이다.

이 선생은 “스승님과 함께 생활하고 교육받으면서 배운 것은 사람이 작업을 하면서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즉 정직하게, 속이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면서 “이것이 장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자 정신”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끈기와 인내력도 필요함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나전이 최고

이 선생은 나전장의 매력에 대해 “전복껍질을 가공했을 때 확실히 나타나는 오색”을 꼽으며 “이때 나타나는 오색은 신비감이나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이 주는 재료에 매혹돼 일반인들도 호감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주로 장식품을 시작으로 장롱 등 생활용품으로까지 만들어져 1970~80년대 말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나전이었지만,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의 생활로 바뀌면서 장롱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현재 국내에서 나전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고 지적했다.

그는 “농(籠) 자체가 설자리가 없어져 생계수단으로 종사하던 나전장들은 그만뒀고, 현재 작품으로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남아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나라 시연을 다녀본 결과 객관적으로도 우리나라 나전이 ‘최고’라고 손꼽았다. 그는 “나라마다 특색이 있는데, 특히 유럽은 거의 시각적인 효과만 냈다. 뚝뚝 잘라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붙인 정도”라면서 “우리가 최고의 나전 기술로 해외시장을 공략하면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함을 강조했다.

▲ 이형만 선생의 작품들 ⓒ천지일보(뉴스천지)

◆ ‘국민적 관심’ 필요

여느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선생 역시 경제적인 면이 가장 어렵다고 토로했다. 전수교육비만 문화재청에서 지원되고 있어 만만치 않은 재료값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 말고도 해상오염 때문에 전복이 서식을 못해 재료가 줄어든 점도 그가 작업해 나가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자개를 수입하는 추세인데 우리나라 자개만큼 영롱하게 예쁘지 않고 단색 종류가 많아 마땅히 쓸 재료가 없다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까운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우리나라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줬지만 일본은 국보로 지정해 다양한 지원이 나온다. 국가에서 그만큼 인정을 해주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답답해했다.

이 선생은 현재 가족들과 함께 나전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장남 이광웅 씨가 이수자로, 둘째아들 이상훈 씨가 전수장학생으로 각각 전통을 잇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국민들이 먼저 우리의 것을 인정하고 아껴야 세계에서도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을 남기면서 전통문화에 모두가 관심 가져주길 당부했다.

이 같은 이 선생의 바람대로 나전공예와 함께 전통문화가 밝은 빛을 볼 날이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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