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무제가 양치기로 성공한 복식을 관리로 임명하려고 하자 공손홍이 반대를 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서 이민자들의 비용 부담이 어려워지자 복식이 20만전을 하남 태수에게 기부해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소식을 들은 무제가 그를 현령으로 임명해 역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무제는 그를 다시 왕자의 태부(교육 담당)로 삼았다.

대농승 공근은 제철 전매의 국유화 공로로 3년도 되기 전에 대사농(경제장관)으로 승진했다. 후임의 대승농으로는 상홍양이 임명돼 회계 업무를 손에 넣고 균수관(물자의 수송담당)을 신설해 그것을 차츰 각지에 두고 물자 유통의 원활을 꾀했다.

또한 매관 제도를 가일층 확충해서 하급관리까지도 곡물을 바치면 고등관으로 승진되고 간부의 자격을 얻은 자는 6백석까지의 지위(국장급이나 지사)를 돈으로 살 수 있도록 했다.

통화 제도를 개정한 5년 뒤 원정 원년(기원전 136)에 화폐를 몰래 만든 죄로 사형이 선고돼 있던 관민 수십만명에게 대사령이 있었다. 자수함으로써 사면된 자만 해도 백여만명에 이르는데 법을 어긴 자가 너무 많아서 처벌하려고 해도 미처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무제는 박사인 저대와 서언을 각지에 보내 호족이나 고급 관리로서 욕심을 채우는 자들을 적발해 내었다. 그 지휘를 맡은 것이 어사대부 장탕이었다. 그의 밑에서 혹독한 관리로 알려진 김진과 두주는 어사중승(감찰차관)을 맡았으며 같은 어사중승인 의종, 윤제, 왕온서 등은 나쁜 방법에 의해 대신의 지위를 차지했다. 임시로 감찰관 직무를 집행하는 직지 제도도 이 무렵에 시작됐다.

이 같은 강력한 통제책에 희생이 된 것이 대사농을 지낸 안이었다.

안이는 제남의 장정이었다. 강직한 인품이 인정되어 대신으로 승진했다.

장탕의 건의로 백록피 지폐의 사용 규칙이 시행된 뒤 무제가 질문하자 안이가 대답했다.

“지금 왕후들이 폐하께 인사를 드릴 때 가지고 오는 옥 값은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으며 깔개로 쓰일 40만전에 불과한 피폐를 사용하라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말씀이옵니다.”

이 사건으로 무제의 기분을 몹시 언짢게 만들었다. 안이는 평소 장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무렵 안이를 고발하는 자가 나타나 그의 조사가 장탕에게 맡겨졌다.

고발된 내용은 이랬다.

안이가 찾아온 손님과 잡담하고 있을 때 화제가 때마침 새로운 법령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손님이 말하기를, “그 법령에는 어딘지 타당성이 결여된 부분이 있더군요.”

안이는 아무른 대꾸도 없이 입을 약간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해 장탕이 판결했다.

“대신으로서 법령의 불미함을 알면서도 건의해 보좌할 책임을 지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그것을 비난하고 있었다.”

장탕은 그 판결을 무제에게 보고해 안이에게 사형죄를 적용시켰다.

이것이 판례가 되자 ‘복비의 법’이 생겨났다.

그 뒤로 대신을 비롯한 고급관리는 그저 무제의 뜻에 맞추고 그의 감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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