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1919년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2시 반에는 탑골공원에서 5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선언식을 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같은 시각에 평양과 의주·원산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은 대내외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대외적으로는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약소민족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전후 평화유지 조치를 합의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고무돼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경술국치 이후 사실상 유폐생활을 한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밤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식혜를 먹고 갑자기 승하하였다.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졌다.  

3.1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친일파 윤치호는 3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3.1운동 반대논리를 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3.1운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 윤치호, 경성일보 3월 7일 

이어서 윤치호는 3월 8일에 ‘매일신보’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조선의 독립은 현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며 설사 독립이 된다하더라도 독립을 유지할 역량이 결여돼 있다고 하면서 지금과 같은 평화로운 시대에 일본과 조선이 서로 적의를 가지면 결국 조선인만 손해인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윤치호는 1912년 105인 사건(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에 출감했다. 그는 첫 기자회견에서 ‘일선동화(日鮮同化)’를 부르짖었다.  

이러한 윤치호의 주장에 민중은 분노했고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이러자 이완용은 3월 9일에 천도교 주임 정광조를 불러 시위를 진정시키는 데 앞장 설 것을 권유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병합 때 자작 작위를 받은 경학원 대제학 김윤식과 부제학 이용직이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이 발생했다. 이완용은 이 소식을 듣고 “이는 조선 민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라고 개탄하면서 곧바로 하세가와 총독을 찾아가 그들의 행위가 시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곧바로 경학원에 통지하여 각 도의 경학원 강사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3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 20일간 절정을 이루었다.  

4월 5일에 이완용은 ‘황당한 유언에 미혹치 말라’는 경고문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 발표했다.  

이완용은 경고문에서 “조선독립이라는 선동이 허설임이 말할 필요가 없음에도 무지몰각한 아동배(兒童輩)가 망동하고 … 근일 듣자하니 모처에서 다수 인민이 사상하였다 하니 그 중에는 혹 주창(主唱)한 자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남을 따라 나선 자이니 경거망동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경고문은 일종의 협박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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