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이완용은 1919년 4월 9일에 ‘돌이켜 자신을 구하고 다복을 구하라’는 내용의 제2차 경고문을 ‘매일신문’에 발표했다. 이때 이완용은 “하세가와 총독에게 관대하게 대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총독은 국법에 관한 중대  사건이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일본 육군성에서 조선의 소요진압을 위해 군대를 증파한다는 방침이 발표된 것을 알고 동포에 대한 충정으로 경고문을 발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제2차 경고문에서 “본인이 지난번 동포 제군에게 경고한 목적은 단순히 인민의 사상(死傷)이 없게 하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제군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각처의 언론이 갈수록 엄중하니 본인도 조선인인지라 책임상으로든지 인정상으로든지 그 위험이 목전에 닥친 것을 알고 있는 이상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바, 매국적(賣國賊)의 경고라 하여 자신의 안위와 관련되어도 듣지 않음은 너무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자못 호소조로 썼다. 

제2차 경고문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이완용이 스스로 ‘매국 역적(賣國賊)’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장본인임을 실토한 것이다. 이러한 이완용의 고백은 당시 백성들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얼마나 수군거렸을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한편 5월 30일에 이완용은 세 번째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 경고문은 앞서 두 차례의 경고문과는 사뭇 달랐다. 두 번의 경고문이 협박성이었던 것과는 달리 3.1 만세운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가던 시점에서 나온 세 번째 경고문은 조선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장문(長文)이었다.   

이 글에서 이완용은 먼저 ‘조선독립지설의 허망함’을 역설했다. “이번 조선독립지설은 구주대전(歐洲大戰)의 여파로 최근에 수입된 소위 민족자결주의라는 말이 제군으로 하여금 동요케 한 원인이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 부적당함은 본인이 다시 말하지 않거니와 … 대저 조선과 일본은 상고이래로 동종동족(同宗同族)이며 동종동근(同種同根)임은 역사에 있는 바라 그런즉 일한합병으로 말하면 당시에 내(內)로는 구한국의 사세와 외(外)로는 국제관계로 천만번 생각할지라도 역사적 자연한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리하여 단행된 것으로 … 우리 조선은 국제경쟁이 과격하지 않던 시대에도 일국의 독립을 완전히 유지하지 못했음은 제군도 아는 바로써 오늘날과 같이 구주대전으로 인하여 전 세계를 개조하려는 시대에 삼천리강토와 천여 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외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오”라고 조선 독립이 불가능함을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병합 이래 근 십년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다”라고 총독정치의 실상을 왜곡하면서 “지방자치, 참정권, 병역, 교육, 집회와 언론 등의 문제는 제군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고 회유하고 “제군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케 하며 전도의 광명을 개척하며 욕망을 도달케 하는 원동력은 가장 급히 실력을 양성함에 있으니 제군은 더욱 열심히 하라”고 끝맺었다.

이완용의 ‘실력양성론’은 일제에 투항한 많은 변절자들에게 하나의 교과서가 됐다. 3.1 운동 후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 이광수를 비롯한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부르짖은 실력양성론의 원조는 바로 이완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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