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됐다. 이로써 1392년에 개국해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개칭한 조선왕조는 518년 만에 망했다. 순종은 일본 메이지 천황에 의해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됐고, 고종은 이태왕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한일합병 조약 제8조에는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와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아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고 돼 있는데 일본은 한일병합조약에 대하여 각부 장관이 서명하고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 공포했다. 반면에 이완용은 순종의 재가를 받지 않고 직인만 찍어 합병을 공포했다.

훗날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승하하기 직전에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며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신한민보 1926년 7월 18일 기사)

한편 일본 천황은 대사령을 내려 국사범과 정치범 8백명을 석방했고, 은사공채 3천만엔(1999년 가치로 3600억원)을 발행해 왕족, 대신부터 시골 양반, 효자열녀에 이르기까지 8만 9864명에게 골고루 뿌렸다. 

일제는 합병 당일로 조선귀족령을 반포해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각기의 공로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완용은 후작의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고, 박제순·조중웅은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런데 작위를 거절한 자도 있었다. 김석진과 조정구는 작위를 거부했고, 한규설, 유길준, 윤용구 등 6명은 반납하여 매국친일파는 모두 68명이었다.  

8월 29일은 국치일(國恥日)인데도 불구하고 종로 거리는 의외로 조용했다. 을사늑약 때와 달리 반대 시위나 통곡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일제가 미리 언론통제 등 강압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순국한 애국열사가 없지는 않았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권의 ‘순국의사’ 조에는 순국의사 29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다. 

금산군수 홍범식, 주러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진사 황현, 판서 김석진, 내관 반학영, 의관 백인수, 참판 송도순 등.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목매어 자결했고,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은 권총 자결,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을미 의병장 이만도는 안동에서 단식하다 순국했으며, ‘매천야록’ 저자인 구례의 선비 황현은 절명시 4수를 쓰고 독약을 마셨다.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이 세상 망하고 말았구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글깨나 아는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판서 김석진은 음독 자결했으며, 관내시부사인 환관 반학영은 파주에 은거 중 할복 자결했고, 중추원 의관 백인수는 단식 자결했다.   

또한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가 여럿이었다. 이회영 6형제는 명동 일대의 가산을 모두 정리한 돈 600억원을 들고 중국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안동의 이상룡 일가도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갔다. 이건승·정원하·홍승헌 등 강화학파 선비들도 자결 대신 항일을 택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여러 애국지사들이 만주로 가서 항일을 택했다.  

한편 이완용은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런데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1919년에 일어났다. 바로 3.1운동이었다.

(다음 회 계속)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