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10년 8월 4일 밤 11시에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은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춘 다음에 내방목적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한일병합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병합 후 조선왕실과 정부대신들의 지위가 어떠한지를 타진했다. 고마쓰는 “왕실은 일본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정부 대신도 작위를 받고 세습재산도 받게 된다”고 전해주었다.   

다음날 이인직은 이를 이완용에게 보고했고 이인직의 보고에 고무된 이완용은 합병 추진을 결심했다.  

3~4일 후 이인직은 예전처럼 밤에 몰래 고마쓰를 찾아가 이완용의 말을 전했다. “병합 조건이 의외로 관대하며 그 정도면 병합 실행이 그렇게 곤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 너무 오래 끌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 아침, 2009, p.27)

훗날 고마쓰는 자신의 저서인 ‘명치외교 비화’에서 이완용이 먼저 한일합병을 제의한 것을 일컬어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온 기분이었다”고 썼다.    

8월 16일에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통감관저로 불렀다. 야마가타 부총감이 동석하고 한국 측은 이완용 혼자만 참석했다. 통역은 통감 비서관 고쿠분 쇼타로가 맡았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에게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일합병을 할 수 있으나, 두 나라의 화목 도모를 위해 합의로 조인하고자 하니 협조해 달라고 하면서, 미리 준비한 각서를 내놓았다.   

그 내용은 ‘1) 병합 후 대한제국의 국호는 조선으로 바뀌며, 황제·태황제는 공전하·태공전하로 바뀐다.  2) 의친왕 이하의 황족은 공후백 등의 작위를 받는다. 3) 현 내각 이하 고관은 은사금을 받고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시정 자문의 기회를 부여받는다. 4) 조약 체결은 총리대신이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대임(大任)을 담당한다’이다.   

이 자리에서 이완용은 데라우치가 제시한 합병 안을 대체로 수용했다. 다만 이완용은 국호의 존속과 황제와 황실의 지위 유지를 강하게 요구했다.  

16일 오후 9시 농상공부 대신 조중웅이 통감을 내방하여 국호보존과 왕칭 유지를 다시 제안했다. 이에 대해 데라우치는 대한제국의 국호는 조선으로 하고, 순종은 이왕, 고종은 이태왕으로 바꾸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틀 후인 8월 18일에 이완용은 조중웅에게 명하여 내각회의를 열게 했다. 내부 박제순, 탁지부 고영희는 동의 쪽으로 기울었지만 학부대신 이용직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용직은 이후 회의에서 배제당했다.  

8월 22일 오후 1시에 어전회의가 소집됐다.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이완용 등 4명의 내각대신, 시종무관과 원로대신 및 황족 대표들이 속속 입궐했다. 오후 3시에 순종은 내전에 나와 전권위임장에 서명하고 국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내려주었다. 오후 4시에 이완용은 조중웅을 대동하고 곧바로 남산 기슭의 통감관저로 가서 한글과 일본어로 된 각 2통의 병합조약에 기명날인했다. (이태진·이상찬 저,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 – 불법성의 증거들, 동북아역사재단, 2010, p.220~224) 

한일합병조약은 한국 정부가 요청하여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체결됐다. 이완용이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18년 만에 망했다.

(다음 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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