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중국에는 당나라 때부터 성현으로 불리는 한국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관료로 활약한 최치원이 주인공이다. 현 정부 들어 중국 최고지도자가 언급할 만큼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최치원이 중국에서까지 이토록 주목받는 이유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국인 최초의 당나라 관료였다는 점 외에 다방면에서 국적을 초월하여 관료로서 최고의 인품과 자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868년(경문왕 8년),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생에 불과했던 그가 홀로 조기유학을 간 셈이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가득했지만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의식주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어려움, 문화적 충격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처럼 산적한 악조건에서도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정신으로 학문에 정진한 결과, 18세에 중국 과거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의 뛰어난 재능에 감탄한 당나라 황제는 그에게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하기도 했다.

최치원이 상관이었던 회변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의 일화를 보자. 최치원이 봉급에다가 행자(行資)까지 받은 상황이었는데, 다시 한달치 봉급을 더 받게 됐다. 그 이유는 그의 성실함, 겸손하고 정직한 인품을 높이 평가한 고변이 베푼 특혜였다. 그러나 그는 한달치 봉급을 바로 돌려보냈다. 이에 감명을 받은 고변은 기어이 최치원에게 되돌려주면서 ‘귀향 꿈을 이루고 집도 윤택하게 하라’며 축원까지 해줬다. 유학을 떠난 지 17년 후인 885년, 그의 나이 29세에 경주로 귀향할 때 당나라 희종 황제가 조서(詔書)를 줄 정도였다. 사신으로서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는 당시 중국에서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받던 한국인 관료였다.

그의 인품 또한 당나라에서 높이 평가됐다. 그에게 녹봉으로 200%를 지급해 준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당나라의 천자가 내려준 도통순관직(都統巡官職)을 사양하고 공첩까지 반납할 정도로 겸손했다. 그야말로 최치원은 과분한 벼슬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어떠한 것도 탐내지 않았으며 오직 당나라의 국제 관료로서 직분을 소신껏 수행했던 것이다.

최치원의 올바르고 도리에 맞는 가치관, 공직자로서의 인품과 자질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정도(正道)를 걷고자 노력했다. 평등, 상생, 신뢰, 우호협력에 기반한 공직자로서의 자세는 아직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우리의 현 국정 운영에 큰 시사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한국인 관료로서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에게 부각된 점이라면 도덕성, 청렴성, 올바른 가치관, 국제 감각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면에서 중국인들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시민사회에 살고 있는 세계시민이다. 국가번영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잘못된 구습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우리 모두가 최치원과 같은 인품과 자질을 지닐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선진국형 국정 운영에 발판을 마련하고 도우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래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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