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필자는 국민적 여망이 개헌과 대대적인 국정개혁에 있다고 본 칼럼에서 누누이 역설해왔다. 권력이 한 곳에 과도하게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국정 시스템, 국민 기본권과 복지의 위축, 여야 거대 양당 ‘그들만의 잔치’를 유도할 뿐인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문제점 등 때문이었다. 그런데 ‘87년 체제’와 ‘6공화국’ 극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언급이 며칠 사이에 잇따라 나왔다.

그 하나는 전남 강진에서 칩거해 온 더불어민주당 손학규 전 상임고문의 발언이었다. 20일 정계 복귀를 선언한 그는 “1987년 헌법체제가 만든 6공화국은 그 명운을 다했다. 정치와 경제의 새판 짜기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손 전 고문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아 텅 빈 제 등에 짐을 얹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24일 국회 시정연설이었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 개헌 추진의 적기라면서 임기 안에 개헌을 완수하겠다고 했다. 김무성 김종인 남경필 오세훈 김부겸 등 잠룡들과 정세균 국회의장 등이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제3지대론도 탄력을 받고 있다. 개헌추진과 함께 정계개편이나 합종연횡이 예상된다. 넓게 보아 대통령의 언급은 손 전고문 생각과 같은 맥락이다. 근거 없는 추측이겠지만 사전교감설까지 나온다. 2년 2개월간 내공을 다져온 손 전 고문의 발언은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복귀를 기다렸다는 듯 ‘댓글부대’가 비난발언을 쏟아냈고, 현직 대통령이 다시 개헌 추진 선언으로 쓰나미처럼 나흘 전 발언을 휩쓸고 지나가버렸다. 손 전 고문이 겨냥한 개헌이슈 선점도 물타기로 농도가 희석되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박 대통령은 시기부터 놓쳤다. 언급한 대로 정녕 개헌필요성을 인정한다면 현 정부 출범과 함께 바로 논의를 시작해 시간을 두고 충분히 준비하도록 조치했어야 했다. 헌정체제 변경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그리 쉬 뒤집을 일이 아니라면.

손 전 고문의 정계복귀 발언은 너무 안이했고, 심히 점잖았다는 평이다. 평소에도 조심성 있는 영국신사 같은 스타일이긴 했다. 그는 ‘나를 따르라’며 대권도전 선언을 하지 않았다. 또한 치열한 대여투쟁을 선언하지도 않았다. 단식을 밥 먹듯 하며 국민혁명 수준의 자극적인 정권타도 투쟁에 나섰던 YS나 DJ처럼 말이다. 은퇴선언은 왜, 또 복귀선언은 왜 했는지에 대한 강한 임팩트가 전해지지 않는다. 작심하고 내놓은 제3지대 개헌추진의 주도권도 뺏긴 듯하다. 그러나 개헌반대론자인 문재인·안철수 후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원하는 분위기가 현재의 민심이다. 이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는 않았다. 모처럼 잠룡들이 안고 있는 ‘대통령병(大統領病)’이라는 불치병에서도 초연한 메시지였다. 문제는 언제까지 백의종군만 할 것이냐는 부분. 정치는 현실적으로 세(勢)를 모아 권력을 쟁취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박 대통령은 말이 바뀌었다. ‘블랙홀’ 발언의 당사자였다. 경제살리기에 전념하기 위해 개헌은 안 된다고 했다. 불과 2주전까지. 색안경 끼고 보며 금단시 했는데 뜬금없이, 그것도 임기 말에 개헌추진 입장을 밝히니 국민이 그 색안경을 다시 끼고 볼 수밖에. 노무현·이명박 두 대통령의 개헌추진은 임기 초가 아니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4년연임제 개헌을 들고 나온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까지 비판했었다. 2012년엔 4년 중임 대통령제 개헌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5년단임제를 문제 삼았는데, 이번에도 혹시 대통령중심제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아쉽다. 6공화국헌법은 권력이 지나치게 한 곳에 쏠리고 권한의 위임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므로. 시일도 촉박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위기극복용, 국면전환용, 정권연장용이라는 의구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국기문란도 이런 국기문란이 없다. ‘우병우’도 ‘우병우’지만 ‘최순실’ 손에 대통령 기밀이 좌지우지됐다면 과거 전제정치시대나 다름없는 한국이다. 문건유출이 사실이면 개헌이고 무어고 시스템이고 무어고 간에 국민 눈에는 다 우스울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수사대상이라는 목소리까지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최순실게이트’는 험난한 벽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 스스로 의혹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보여줘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개헌은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꼭 추진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권력구조문제에서 나아가 민생과 경제, 바른 교육, 국민 기본권 보호를 위해 필연이다. 그 성패는 진정성 여부, 즉 국민의 마음을 얼마나 감동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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