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진순신(陳舜臣)의 아편전쟁은 서구의 충격을 받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나라 말기의 중국의 상황과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지식인들의 몸부림을 생생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아편전쟁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839년 4월, 몰래 북경을 떠나는 공자진(龔自珍)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자진의 부친 공려정(龔麗正)은 국어보주(國語補注)를 남긴 학자였으며, 모친 단순(段馴)은 여류시인으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주를 단 유명한 문자학자 단옥재(段玉裁)의 딸이다. 대단한 혜택을 받고 태어난 셈이다. 진순신은 그가 황족의 애첩 고태청(顧太淸)과의 밀애 때문에 북경을 떠났다고 했지만, 아무튼 이후로 그는 다시 북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몹시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다시는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귀향길에 무려 350수나 되는 시를 지었다. 그것이 유명한 기해잡시이다.

청의 부패와 서양의 압박은 지식인의 민감한 감성을 강하게 자극했다. 유달리 민감했던 공자진의 절박함은 더욱 심했다. 진강(鎭江)을 지날 무렵,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는 것을 보았다. 기원문은 푸른 종이에 적었으므로 ‘청사(靑詞)’라 했다. 공자진을 알아 본 도사가 청사를 부탁했다. 그는 명말청초 명이대방록을 지은 황종희(黃宗羲)의 심정으로 시를 지었다.

구주생기시풍뢰(九州生氣恃風雷), 만마제암구가애(万馬齊喑究可哀)
아권천공중두수(我勸天公重抖擻), 불구일격항인재(不拘一格降人材)
구주(중국)에 태어난 사람들은 풍신이나 뇌신을 믿고,
수많은 말들은 일제히 슬프게 울고 있구나!
하늘에 비노니 다시 한 번 떨치고 일어서게 해 주시려면,
부디 파격적인 기상을 갖춘 인재를 내려주소서!

이 시는 생전의 모택동(毛澤東)이 애송했다고 한다. 공자진은 자괴감에 빠져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우렁차고 통렬한 문장으로 개혁, 민주, 인재등용 등을 요구하며 구시대 전통과의 투쟁을 선언했다. 중국의 근대정치사상사나 문학사는 공자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아편전쟁의 영웅 임칙서(林則徐)는 공자진과 함께 선남시사를 결성했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공자진은 섬세하고 열정적인 감수성을 지닌 문인이었지만,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해 많은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키는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측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유명한 병매관기는 항주의 영은사(靈隱寺) 서쪽 서계(西溪)에서 매화를 감상하면서 쓴 글로 당시 정치에 대한 그의 분노가 담겨있다. 그는 여러 곳의 매화를 평가하면서, 문인과 화가들이 건강한 매화보다는 병든 모습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매화는 굽어야 아름다우며 곧은 것은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 또 기울어진 것을 아름답다고 하면서 바른 것은 볼만한 가치도 없다고 한다. 드문드문 피어난 것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빼곡하게 피어난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 매화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취향대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바른 것을 비틀고 잘라서 곁가지를 내고, 빼곡하게 피어난 것을 솎아내며, 어린 가지를 곧게 자라지 못하도록 하여 생기를 없앤다.”

그는 그래서 절강의 매화가 모두 병신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매화의 성장을 속박하는 끈을 풀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병매관’이라는 집을 짓고 300그루의 매화를 심었다. 병매관의 매화는 자유롭게 자랐다. 국가가 활력을 찾으려면 모든 속박에 제거돼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지만 결국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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