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통일신라가 이룩되던 시기에 불교를 넘어서 민족의 통합을 주도한 위대한 사표였던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은 화엄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했다. 두 고승은 라이벌이자 환상의 콤비였다. 당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나다가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부처의 법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섰고, 의상은 화려하고 장엄한 세상을 여는 대당제국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을 떠나 각자의 근기에 따른 장대한 행보였다. 중국은 서진이 멸망한 이후 오랜 분산의 시기를 지나 수당시대라는 통합국면을 이룩했다. 그 주역은 부계는 중국, 모계는 선비족으로 혼혈이었던 관농(關隴)집단의 젊은 피 이세민이었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화엄사상에서 ‘다즉일’이 실현되었다. 중국의 통일은 불교의 화엄세계가 주도했다.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병립하면서 오랫동안 분열돼 있었다. 동남쪽 모서리를 차지한 약소국 신라가 호국불교를 바탕으로 ‘다즉일’을 향한 용틀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의상이 ‘다즉일’을 추구했다면, 원효는 화쟁론(和諍論)을 바탕으로 그 과정에서 배제된 민중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과감히 세속으로 뛰어들어 ‘일즉다’를 추구했다.

신라의 통일은 신흥대국 당과의 군사적 연합을 통해 이룩됐다. 그러나 광대한 만주를 잃은 불완전한 통일에 불과했다. 동맹국이던 당은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백제와 신라까지 손에 넣으려고 했다. 신라는 당의 압력을 막아야 하는 난제에 부딪쳤다. 충남 예산 가야산에는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임존성이 있다. 그 앞바다에서 당의 세력을 막기 위한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신라는 당군을 몰살하고 반도통일을 완성했다. 점령지인 백제의 고토에서 당군을 막아내려면 백제유민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얼마 전까지 격렬하게 반발하던 백제유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사상이 바로 원효와 의상이 주도한 화엄불교였다. 두 고승이 창건했다는 사찰이 전국에 흩어져 있지만, 주요한 화엄불교의 사찰은 양양의 낙산사에서 구례의 화엄사에 이르기까지 소백산맥을 따라 분포됐다. 고구려와 백제의 고토와 신라의 영향력이 만나는 경계선에서 ‘일즉다, 다즉일’을 민족통일의 이념으로 펼쳤다는 자취이다. 서로 다른 길을 갔던 원효와 의상의 행보가 화엄불교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 덕분에 통일국가와 민족개념이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탈세간(脫世間)을 추구한다고 알려졌다. 현실에 소극적이라는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8세기에 중국과 한국에서 꽃을 피운 화엄불교는 세속의 정치를 통한 불국토건설을 추구했다. 그 핵심에는 대승불교의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보살도가 있었다. 상구보리의 목적은 하화중생이었고 하화중생을 통해 다시 상구보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효가 환속의 길을 걸은 것은 하화중생의 실천이었다. 의상은 하화중생의 꽃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의상이 해동화엄의 종찰로 삼은 소백산 부석사와 양양 낙산사 의상대에서는 그가 추구했던 화엄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가 질 무렵 부석사 안양루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과 황금빛 석양이 어우러진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를 볼 수 있고, 해가 뜰 무렵 의상대에서는 꿈틀거리는 동해의 웅대한 생명력이 붉은 일출과 어우러진 약사불의 동방세계를 볼 수 있다. 의상이 화려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원효는 그 속에서 각자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체들의 조화를 이룩하려고 했다. 두 고승은 따로 존재해도 위대했고, 어우러지면 더욱 찬란한 빛을 발휘했다. 통일담론에서 정치, 외교, 경제, 군사, 이념과 같은 분야도 중요하지만 민족통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종교적 성찰도 빠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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