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지방 나들이에 나선 그날은 하필 어느 토요일이었다. 주말인지라 고속도로를 빽빽이 매운 각양각색의 차량들이 엉금엉금 길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은 ‘서해고속도로’였다. 우리는 동종(同種) 업종에 종사했거나 종사 중인 선후배들과 그중 일부가 모시고 온 가족들까지를 모아 단출하게 나들이 일행을 구성했다. 우리를 태운 대형버스 역시 길바닥에 배를 깔고 힘들게 숨을 헐떡였다. 속 시원하게 공중으로 휘익 날아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밀리는 길에서도 우리는 3시간 이상을 조바심을 내지 않고 매연을 들이키며 태연히 버티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한달음에 첫 목적지 군산에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주변 산천을 구경하기’란 필시 여간 힘들고 바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겨우 하룻밤만 자고 되돌아와야 했던 우리의 나들이가 그와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시간은 넉넉지가 않은데 일정은 꽉 차고 넘쳐서 다소는 쫓겨야 했던 ‘주마간산(走馬看山)’ 1박 2일이었다. 이러했다. 우리는 길 메이던 당일의 첫 일정으로 지각 도착한 군산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첫 날은 그렇게 군산에서 오찬을 끝낸 후 군산 옥구 지역 근대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근대역사박물관’을 거쳐 새만금 방조제와, 방조제 안쪽의 공사 중인 방수제를 주의 깊게 탐방하고 새만금 홍보관을 방문해 관계자의 설명을 듣기로 돼있었다. 이 일정들은 약간씩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그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런 후는 바로 부안 변산반도 격포로 건너가 석식 후 1박하고 다음날 오후 2시쯤에 변산반도의 곰소와 내소사, 부안읍의 신석정문학관, 정읍의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방문까지를 끝내고 서울로 되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일정이었다. 이것들도 애초의 예정대로 거의 정확하게 집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꽤 빠듯한 일정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거기에다가 자칫 피로해질 수도 있는 끼니마다의 통음(痛飮)을 즐기고 나누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모두가 반가운 선후배들끼리의 만남에 즐거움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일정에는 쫓길지라도 이런 만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로주 같은 엔돌핀(endorphin)을 솟게 하며 동시에 그런 여행은 사람들의 메마른 심신에 상쾌한 ‘힐링(healing)’의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불타는 저녁노을이 장관인 변산반도 격포에서는 석식 후 장소를 옮겨 가면서 모처럼 선후배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며 밤늦도록 실컷 먹고 마셨다. 물론 치열한 토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래저래 채석강의 파도가 유달리 잔잔하게 철썩이던 그날 밤, 혹여 그렇게 그런 식으로 훤히 그 밤을 지새워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밤늦도록 벌어진 토론이나 끼니마다의 여흥(餘興)이 우리의 일정에 차질을 빚거나 쫓기는 강행군에 장애를 조성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모두의 타고난 건강과 단련된 내공(內工)이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논외로 한다면 우리가 머물고 거친 지역들이 빼어난 천혜의 청정지역이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바로 그곳의 맑고 깨끗한 공기와 시원한 바닷바람, 인체에 좋은 ‘피톤치드(phytoncide)’로 가득한 싱그러운 숲 바람이 우리의 몸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피톤치드’는 편백나무 측백나무 전나무 등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천연 항균 물질이다. 그것이 때로는 주변 나무들에 고사(枯死)의 피해를 입힐 수는 있으나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이롭다. 600여 미터에 걸쳐 내소사 진입로 길 양쪽에 길게 쫙 늘어선 피톤치드를 내뿜는 전나무 가로수들은 오래전부터 이름난 구경거리로 내려왔다. 수령이 100년도 더 되는 하나 같이 키 큰 나무들이다. 그것들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아 해를 가림으로써 자연스레 어두컴컴하고 길고 긴 가로수 터널이 생겼다. 그렇게 특유의 경관과 볼거리, 나무들이 뿜어대는 피톤치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소사로 끌어들인다. 우리가 둘째 날의 첫 일정으로 그곳을 찾은 그 날 역시 공휴일이어서 평소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경향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와 경내를 붐비게 했다. 우리를 포함해 꼭 부처님을 뵈러 온 사람들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에 비하면 발군의 시작(詩作)으로 뭇 아픈 영혼들을 다독이고 심금을 울렸던 고(故) 신석정 시인의 고택과 문학관은 그야말로 썰렁한 분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는 그만큼 세태와 사람들의 영혼과 심지, 정서가 빈곤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웅변한다. 정읍의 동학혁명기념관도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점은 오랫동안 허전한 여운으로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동학혁명기념관에 대해서는 갈수록 정부의 관심마저도 식어가는 것 같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는 시무룩해지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화도 났다.

할 말이 너무 많을 때는 정작 말을 제대로 못하는 법이다. 그런 까닭으로 새만금 탐방의 소회에 대한 기술(記述)은 그것이 우리 여행의 주목적이었음에도 뒤로 밀렸다. 새만금은 기네스북에 오른 33.9㎞ 방조제 축조의 대공사를 마쳤지만 갈 길은 여전히 아득히 멀고 험난하다. 이제 와서 방조제를 다시 헐고 옛날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여기서 멈추는 것은 곧 재앙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지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만금이 경제의 글로벌 허브(global hub)로서의 경탄할 만한 세계적 자유경제특구로 새롭게 탄생할 때까지 막연한 기약을 따라 어쩌면 지금까지 새만금에 쏟아 부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머리를 지근거리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새만금 사업의 추동력을 되살려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새만금의 무규제지역화 및 글로벌 경협 특구 조성 방안 등에 대해 채택을 불사하는 특단의 의지를 발휘해야만 한다. 이외에도 할 말은 너무 많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의 주마간산 1박 2일 여행은 기쁨과 힐링을 선물하고 동시에 견문을 넓혀주면서 아쉽게 끝이 났다. 물론 일행과 헤어지는 것은 더 아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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