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의 세상보기] 한글 학자 호머 헐버트-항일 주권 회복 활동 약력 (하)
[최상현의 세상보기] 한글 학자 호머 헐버트-항일 주권 회복 활동 약력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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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현 주필

 
한글 띄어쓰기와 마침표, 쉼표 찍기 등 기호 사용이 한글 창제 때부터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2년 허균에 의해 쓰인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도 그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들이 이루어진 것은 비로소 19세기 말 파란 눈의 미국인 한글학자 호머 헐버트에 의해서였다. 주시경과 함께 한글과 한글 맞춤법을 연구했었던 그는 아마도 그의 모국어인 영어의 띄어쓰기와 기호 사용을 한글에 적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한글을 뛰어 넘어 우리의 고전음악에까지 미쳤다. 바로 아리랑과 한국 민요를 최초로 서양 악보로 제작해 보급한 사람이 헐버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같이 한국과 한글, 한국 문화, 한민족을 위해 온 열정과 영혼을 바쳤다. 그것이 필시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이고 숙명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는 비운의 조선 말 고종 임금을 위해서도 헌신적이었으며 그런 그를 고종은 무척이나 총애하고 신뢰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도 일제에 발각돼 좌절되긴 했지만 그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건이었다. 1905년에는 그 해에 맺어져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해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아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다. 물론 그 노력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미 비밀협약인 일명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져 각기 필리핀과 한반도를 나눠 차지하기로 쑥덕거린 뒤라서 성공할 수 없었다. 루즈벨트는 헐버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헐버트는 뉴욕타임스에 글을 보내 친일 입장을 견지하는 루즈벨트를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조선에서 추방돼 미국에 있으면서도 조선의 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쉬지 않았다. 그가 추방된 뒤 일제는 그가 저술해 조선에 남긴 한글 역사 교과서 ‘대한역사’를 금서로 지정하고 수거해 불태웠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 날을 택해 일제히 봉기한 3.1독립만세운동이 터지자 그는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를 찾아갔다. 헐버트는 그곳에 ‘한국을 어찌할 것인가(What about Korea)’라는 의견서를 공증서와 함께 제출했다. 그밖에 각종 연설과 기고문을 통해서도 그는 일제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독립투사들도 헐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그는 “고종 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일이 결코 없다. 일제에 굴종해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일도 없다. 한민족 모두에게 고하노니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간직하라”고 미국에 사는 조선인들에게 일갈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44년에는 한 책자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을사늑약 직후 고종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다.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해 주목을 끌었다. 역사는 꼭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 그렇다고 볼 때 친일(親日)을 훨씬 뛰어넘어 군사 일체화를 이룬 지금의 미일 동맹이 당장은 매끄러울지라도 미국은 그때의 헐버트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 나쁠 것이 없다.

고종 32년,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은 우리에게 치욕의 날이고 통한의 날이다. 이날 일제는 조선 궁궐을 범해 상상도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했다. 이날 새벽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무리, 일본이 훈련시킨 조선군대가 마포 공덕리 대원군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에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내 사인교에 대원군을 태우고 앞장 세워 경복궁을 향해 호위하며 행진을 서둘렀다. 마침내 경복궁 정문에 이르렀을 때 궁궐 수비 대장 홍계훈이 그들을 막아섰으나 단 칼에 베어버리고 그들은 궁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이 찾는 표적은 더 말할 것 없이 당시 항일 친러시아 세력의 중심인물인 조선의 국모(國母) 민비(1897년 明成皇后로 추존)였다. 그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돼 조련된 듯 일사분란하고 거침이 없이 움직였으며 끝내 시해(弑害)의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그들은 일본에 등을 돌리고 친러시아로 기운 ‘민비’를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을 침략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그 같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의 주모자이자 주도자는 대원군이며 ‘민비’를 시해한 것도 일인(日人)이 아니라 조선군이라고 발뺌해왔다. 애초의 사건 기획이 그런 발뺌을 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며느리 민비 사이의 권력 다툼이 그 둘을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았으며 그때의 대원군은 민비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으려 혈안이 돼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원군은 권력을 잃고 분별심과 냉정을 잃어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며 민비에 복수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반역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원군이 ‘사변’의 주모자라고 대원군에게 혐의를 덧씌우는 일본의 발뺌은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대원군의 결백을 반증하거나 입증해주는 것은 절대로 될 수 없다. 그날 새벽 대원군은 미우라가 뭐라고 협박하고 회유했든 목숨을 내놓고 결단코 그들의 궁궐 침범 기도를 원천 봉쇄했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적어도 사인교에 몸을 싣고 무뢰배들의 앞장을 서는 얼빠진 행위만이라도 거절했어야 옳다.

어떻든 이 난리 통에 임금만 외톨이가 되어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대원군은 일제의 꼭두각시였지만 임금을 위압하기에는 그 위세가 충분했다. 이럴 때 여러 형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립무원의 임금에게 달려간 사람이 바로 호머 헐버트다. 그는 언더우드, 에비슨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조선 사람들도 못 지킨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조선 임금 고종을 그들이 밤잠을 안 자고 지킨 것이다. 그런 그들을 세월이 흘렀다고 우리가 잊어서야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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