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어려울 때의 친구가 참된 친구다(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흔히 쓰이는 그 말은 백 번 옳지만 그런 우정(友情)이 현실에서 흔하게 목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어려움’도 어려움 나름이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친구로서의 신의(信義)가 변하지 않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고사나 전설이 가르치는 그 같은 ‘참된 우정(友情)’에 관한 스토리는 그만큼 더 감동이 진하고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래간다.

참된 우정에 관한 고사로서 동양에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것이 있다. 바로 사기(史記)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오는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사이의 우정 얘기다. 너무나들 잘 알고 있는 얘기지만 대강은 이렇다. 죽마고우인 관중과 포숙아가 벼슬길에 나가 서로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됐다. 관중은 제나라 왕 양공(襄公)의 둘째 아들 규(糾)를, 포숙아는 셋째 아들 소백(小白)을 섬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왕자가 왕권 다툼을 하게 되면서 관중과 포숙아는 피차 적이 되어 대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 왕권 다툼에서의 승리는 포숙아가 섬기는 셋째 소백에게 돌아갔다. 이에 소백은 둘째를 섬긴 관중을 죽이려 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친구 포숙아가 목숨을 걸고 나선다. 포숙아는 관중을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간(諫)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으로 천거까지 해 이를 관철시킨다. 그런 후 자신은 관중의 휘하로 들어가 함께 일한다.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말지는 좀 헷갈리지만 하여튼 관포지교의 얘기의 줄거리는 그러하다.

후일 관중은 포숙아와의 우정에 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나는 포숙아와 장사하며 생기는 이익을 더 챙겼지만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에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내가 전쟁에서 패해 도망을 쳤어도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내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 이처럼 관중에게 포숙아는 일생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행운이고 행복하다는 진정한 지기우(知己友)였다. 관중은 행운아였다. 반면 포숙아는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그것의 표본을 보여준 순수한 ‘신의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 성인과 같은 마음자리를 제대로 헤아리기는 난해하지만 달리는 뭐라고 평가해 말할 빌미가 없는 것 같다.

서양에도 그와 비슷한 얘기가 있다. 서로에게 목숨 걸고 신의를 지킨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이먼과 피티아스(Damon and Pythias)’의 우정 얘기다. 어느 땐가 데이먼은 죽을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그에게는 하나뿐인 여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죽기 전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사정을 말하고 3일 동안의 석방을 간청한다. 대신 자신의 친구 파티아스를 감옥에 갇혀있게 하겠으며 3일 후 약속 시간에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파티아스를 사형시키도록 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과연 친구 파티아스도 데이먼의 제안에 따라 그를 위해 죽음이 기다리는 감옥에 흔쾌히 갇힘으로써 데이먼은 석방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파티아스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다. 왕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3일 후 약속시간이 경과함에도 데이먼은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대로 파티아스는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막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이었다. “안 돼! 잠깐만! 내가 돌아왔소!” 하고 데이먼이 나타났다. 이래서 왕은 이들의 우정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데이먼의 죄를 용서했다는 얘기다. 고대 연극에서 나타나는 판에 박은 해피엔딩의 플롯(plot)인 ‘데이어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냄새가 짙은 그야말로 전설이며 신화다.

‘데이먼과 파티아스’의 신화는 사실성에서는 동양의 ‘관포지교’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렇지만 사실성이 떨어진다 해서 감동이 덜한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동서양의 고사와 신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의’는 사람이 보편적으로 중요시하는 가치다. 개인적 차원의 우정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원활하고 예측 가능한 국가와 사회공동체의 운영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기본 전제가 된다. 비록 ‘관포지교’나 ‘데이먼과 파티아스’에서와 같은 현실 초월적인 ‘스탠다드(standard)’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지라도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이 법과 제도 각종 사회 시스템을 대할 때에, 정치인과 국민 사이에 일정 수준의 ‘신의’가 발휘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면 모든 관계는 혼란과 파탄으로 치닫는다. 모든 관계가 건강하게 성립될 수 없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 날이 가까워지면서 정치판이 역동성을 더해간다. 역동성이 지나쳐 마치 북새통을 방불케 한다. 그것이 국민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고 활발하다면 우리는 행운을 타고난 행복한 국민임에 틀림없을 것이지만 정치판을 역동성으로 넘치게 하는 것은 국민의 복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정치인들끼리의 ‘각축(角逐)’ 때문이다. 정치라는 것이 그렇게 정치인들끼리의 치열한 싸움이 불가피한 영역이라는 것쯤은 국민들이 다 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실제는 어쩔지언정 국민을 위해서라고 둘러댈 수 있고 그렇게 둘러대는 것이 그럴 듯해 보여야지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고 국민이 생각하는 정도면 그건 전혀 ‘수준’을 인정할 수 있는 정치다. 여 야가 마찬가지다. 지금의 그들 당내 계파 싸움에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정치라는 도구를 통해 ‘난타(亂打)’하는 종은 과연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선거 때는 국민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말한다. 어쨌든 이것은 약속이다.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국민에 대한 ‘신의’다. 솔직히 그들에게 관중과 포숙아, 데이먼과 파티아스에서와 같은 철석같은 신의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그들끼리 싸울 때 싸우더라도 국민을 아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눈치도 슬금슬금 보아가면서 조심스레 싸운다는 느낌만이라도 국민에게 주었으면 하는 것이 안타까운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