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그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그는 외국인으로서 한글과 한국어, 한국, 한국인을 사랑하는 데 청춘과 일생을 바친 극히 특별한 인물이다. 특히 한글날에 우리가 그를 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라 할 수 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할보(轄甫)다. 헐벗이라고도 했고 흘법(訖法)이라고도 했다. 1863년 미국 버몬트의 뉴헤이번에서 태어났다. 그 파란 눈의 미국 사나이는 지금 한국 땅 양화진(楊花津)의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그곳은 2살 때 역시 한국 땅에서 그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순서는 뒤바뀌었더라도 이처럼 부자(父子)가 다 머나먼 한국 땅에 뼈를 묻은 진기한 ‘인연’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얼른 입이 열리지 않는다.

헐버트는 대한민국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을 떠난 지 42년 만이었다. 꿈에 그리던 한국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86세로서 어쩌면 한국에 오는 것이 그의 일생에 마지막 여행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그에게는 있었을 수 있다. 그랬기에 그는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며 현지 언론과 가진 접촉에서 의미심장하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된다 했다. 며칠 안 있어 그의 그런 말은 정말 그가 ‘유언’을 말한 것처럼 돼버렸다. 안타깝게도 한국에 온 지 1주일 만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만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긴 하지만 그의 양화진 묘비에 새겨진 비문이 바로 그 ‘유언’이다.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범의 한 사람으로 찍혀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됐었다.

그는 더 말할 것 없이 조선 말기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 裵說, 1872~1909)과 함께 조선의 구국과 독립, 일제 만행의 고발 및 조선의 개명(開明)을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외국인이다. 배설은 고종 황제가 하사한 이름이다. 배설에게는 뒤늦게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헐버트에게는 그가 죽은 바로 다음해인 1950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이 추서됐다. 뿐만 아니라 2014년 한글날에는 한글 보급과 보전에 헌신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이 정부에 의해 추서되기도 했다. 그만큼 조선 말과 대한제국,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헐버트의 활약과 공로는 누구의 그것보다 더욱 국내외적으로 두드러지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가 조선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종 23년인 1886년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 교사로 와달라는 조선 정부의 초청에 의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육영공원에 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의 목숨이 다해 한국 땅에 묻힐 때까지 한글과 한국인, 한국을 위해 헌신해야만 하는 신비한 숙명과 소명의 출발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본인조차도 몰랐을 것 같다. 그는 우선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단 4일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한글의 우수성과 그같이 우수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한편으로 이렇게 우수한 제 글자를 가지고 있음에도 조선인들이 한글보다 한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글과 한국어 공부에 더 정진했다. 3년여를 더 공부한 끝에 그는 드디어 한글로 책을 쓸 정도가 됐다. 그 실력으로 그가 처음 쓴 책이 1890년 발행된 한글로 쓴 최초의 교과서인 ‘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책’이란 뜻의 ‘민필지’다. 이 책은 5대양 6대주에 있는 각국의 정부 형태와 사회제도 등을 설명한 지리 사회 총서다. 그는 ‘민필지’의 저술 배경에 대해 ‘조선인들이 중국의 한문보다 더 훌륭한 제 말글을 우습게 여기고 쓰지 않으며 한문으로 쓴 책만 읽고 있으니 국제 정세에 어둡고 뒤처질 수밖에 없음이 안타까워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헐버트는 이 책의 ‘조선국’편에서 ‘대마도는 조선 땅이다’라고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명백히 밝혀놓았다. 결코 소홀히 넘길 대목이 아닌 것이다.

그는 1902년 미국 뉴욕에서 발간되는 하퍼스(Harper’s New Monthly Magazine)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글·금속활자·거북선·현수고·폭탄’ 등을 ‘조선의 위대한 다섯 가지 발명품’이라고 소개하고 ‘한글은 노예 해방이나 다름없는 문맹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한글이 준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며 조선 공문서를 한자로만 쓰는 것을 개탄했다. 그는 또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보고서에 기고한 ‘한국어(THE KOREAN LANGUAGE)’란 글에서는 ‘영어보다 한국어가 우수하다’고 했다. 그 밖의 국내외 기고나 저술 등을 통해서도 그는 ‘한글은 그 단순함과 음성을 표기하는 능력에 있어 세계에 한글을 당할 글자가 없다(Korean alphabet scarcely has its equal in the world for simplicity and phonetic power)’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한국인들이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쓸 것이며 한자는 영어의 라틴어와 같이 될 것’이라 내다보고 ‘중국인들도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쓰면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필시 한글 세계화의 효시를 이루는 인물이며 그것을 통해 최초로 ‘한류’의 씨를 뿌린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 헐버트는 한국 사람보다 더 한글과 한국인, 한국을 영혼을 바쳐 사랑했다. 우리는 우리글의 우수성을 잘 안다. 그는 이에 대한 영원한 증인이다. 그가 있어 우리의 자부심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객관적’인 것으로 뒷받침된다. 어찌 잊으랴 그 이름 ‘호머 헐버트’를! 그의 명성은 한글과 함께 영원히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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