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전투마다 동학농민군에 관군이 격파되고 쫓기면서 전주가 함락되자 초조해진 고종과 민 왕후는 청군을 불러들였다. 이에 응해 청군이 들어오자 일본 역시 1884년에 맺은 톈진(天津)조약을 내세워 군대를 이 땅에 보냈다. 톈진조약에는 두 나라가 조선에 파병하거나 조선에서 철수할 때 피차에 통보하고 두 나라가 동시에 파병 또는 철수키로 한 조항이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두 나라의 군대가 들어오자 동학농민혁명군은 그들에게 개입 명분을 주지 않으려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싸움을 중단했다. 하지만 그들의 승냥이 본성이 그것으로 거두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일본군은 청을 패퇴시키고 조선을 확실히 손아귀에 넣으려는 결기를 가지고 파병돼왔음이 분명했다.

1882년 구식 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과 1884년 친일 개혁파의 갑신정변에 대처하면서 민 왕후는 연속 청나라 군대에 신세를 졌다. 특히 그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임오군란 때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줌으로써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다시 왕후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원군은 3년여 톈진에 붙잡혀 있다가 1885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함께 돌아왔다. 민 왕후는 갑신정변 때도 청군의 도움에 의해 개혁파와 일본군을 내쫓을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처하면서도 민 왕후와 고종은 애초에는 청군의 신세를 지는 것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뒤따라온 일본군이 청군에 밀리거나 기선을 제압당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국에 증원군까지 요청해 불러들였다. 그런 후 청에 제안하기를 조선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했다. 청이 이를 거절하자 일방적으로 주한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를 앞장세워 군대를 이끌고 입궐해 자꾸만 청으로 기우는 민 왕후 정권을 몰아내버리고 친일 개혁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른바 ‘갑오개혁’ 조치다. 이 조치로 흥선대원군은 꼭두각시로 내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아예 조선을 독점하기 위해 청과 전쟁을 벌였다. 7월에 일본군은 조선 주둔 청군을 기습 공격했다.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이 전쟁은 두 달여 만에 유럽 열강을 배경에 둔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침탈의 수순을 착착 밟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외세 배격’이 그들 봉기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한 동학농민혁명군은 이에 분격하게 된다. 그들은 다시 떨쳐 일어났다. 9월 초 전봉준의 남접 군이 결집해 북상을 시작했다. 교주의 신원(伸冤)에만 관심을 두던 북접의 최시형도 10월 들어서 전국 동학도에 일제히 기포(起包)할 것을 촉구하며 남접 군에 합세해 척왜(斥倭) 항전에 나섰다. 드디어 12월 5일(음 11월 9일)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회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12월 10일(음 11월 14일)까지 계속된 치열한 전투에서 무장이 우수하고 잘 훈련된 정예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연합군에 동학농민혁명군은 패퇴하고 만다. 이래서 동학농민혁명군은 논산으로 또 전주로 후퇴하게 된다. 거기서도 원평을 거쳐 태안까지 밀렸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전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전봉준은 순창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김개남은 태인 송종리에서 옛 친구의 밀고로, 최시형은 원주 송골마을에서 역시 현상금을 노린 밀고에 의해 붙잡혀 처형된다. 이렇게 해서 권력의 탐학과 학정의 일소, 외척 배제, 탐관오리의 척결, 보국안민, 신분차별의 철폐와 만민평등, 외세배격을 부르짖은 동학농민혁명은 일견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동학혁명의 정신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의미심장한 평가를 받으며 후대들의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교훈적인 울림도 점점 더 커짐으로써 아주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도리어 ‘불멸의 정신 혁명’이 됐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 같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녔으며 누구나 대의에 공감하는 혁명이었음에도 실패한 직후에는 ‘동학란’ 또는 심지어 ‘동비의 난’이라고 폄하됐었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대로 쓰인다는 것을 우리에게 한 번 더 실감시켜줄 뻔했다. 적어도 1910년 동학혁명을 무참히 진압한 대한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떻든 동학농민혁명은 민초들에게보다는 이 나라 지도자들을 뼈아프게 가르치는 역사적인 교훈들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다. 정약용은 말했다. ‘사람들은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고통은 모른다(人知坐輿樂 不識肩輿苦/인지좌여락 불식견여고).’ 가마 타는 즐거움에 취해 가마 메는 민초들의 고통을 모르기 쉬운 것은 지도자들이기 마련이다. 그것이 지나쳐 그들이 오만방자해지면 동학혁명에서와 같이 민초들은 배를 뒤집어엎을 듯이 험하게 돌변한다. 따라서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나 이미 지도자 반열에 오른 엘리트들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이 필수 학습서 내지 필독서, 필수 자습서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또한 동학혁명기념관을 비롯한 동학혁명사적지 답사가 주마간산일지라도 가끔 체험해볼 수만 있다면 자신이나 국민,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도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민초들은 이판사판으로 동학혁명에 몸을 던졌다. 그런 결단은 썩어빠진 정치에 대한 ‘분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봉건의 암흑으로부터 민중을 일깨운 동학의 가르침이 미친 영향이 결정적인 요인이 돼주었기 때문이다. 1860년 동학을 창도할 때 최제우는 ‘한울님은 항상 사람 마음속에 있으며 각 개인은 그 한울님을 모시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주체’라 했다. 바로 ‘시천주(侍天主)’다. 그 다음 교주 최시형은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千)’, 동학을 천도교로 명명한 3대 교주 손병희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千) 사상을 설파했었다. 이렇게 해서 봉건의 틀을 다투어 벗어나는 깨우친 민중들을 탐학과 학정 가렴주구로 억누르고 착취하려 했으니 동학혁명과 같은 세상을 뒤집는 사단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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