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주도 가자 휴전 결의안
상임이사국 러·중 거부 ‘부결’

내용에 ‘즉각 휴전’ 언급 없어
中 “모호·회피·말장난” 맹비난

“美 근본 전쟁 정책 변화 없어”
“통과됐어도 영향 없을 결의안”

가자 휴전결의안 논의 중인 유엔 안보리 (출처: 연합뉴스)
가자 휴전결의안 논의 중인 유엔 안보리 (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22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미국의 가자지구 결의안 채택이 실패한 후 미 ‘책임 있는 국정운영을 위한 퀸시연구소’의 트리타 파르시 부소장이 정치외교안보 전문 잡지 Responsible Statecraft에 이같이 말했다. 문제가 될 요소는 세부 사항에 숨어있다는 표현인데, 이번 결의안 부결의 이유이기도 했다.

이날 안보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에 실패했다. 미국이 제안한 가자지구 휴전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러시아와 중국은 이 조치가 모호하며 직접적인 요구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번 결의안은 특히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렸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 작전을 방어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다른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온 미국이 이번에는 직접 결의안을 내고 표결에 부쳤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동맹국들조차 무조건적인 전쟁 종식을 촉구하면서 세계 각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23일(현지시간) AP통신은 분석했다.

안보리 표결은 다른 곳에서 첨예한 분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 강대국들의 또 다른 대결이 됐고 미국은 계속되는 군사 공격으로 가자지구의 230만 팔레스타인인에게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한 동맹국 이스라엘에 대해 충분히 강경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의 결의안은 거부됐고, 결의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가자지구=AP/뉴시스] 18일(현지시각)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2024.03.19.
[가자지구=AP/뉴시스] 18일(현지시각)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2024.03.19.

◆“美 어조 변했지만 실질적 변화 아냐”

미국의 결의안의 첫 문구는 복잡하고 난해하기까지 했다.

결의안은 “모든 측의 민간인을 보호하고 필수적인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며 인도적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의 필요성을 결정할 것”을 촉구하며 “남아 있는 인질 석방과 연계된 휴전을 보장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명백히 지지한다”고 명시했다.

핵심 쟁점은 “안보리가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의 필요성을 결정한다”는 이례적인 표현이었다. 이 문구는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직접적인 요구나 촉구가 아니었다.

안보리 결의안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신중하게 조정된다. 어조와 단어 선택이 조금만 바뀌어도 상당한 외교적 의미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표결에 앞서 바실리 네벤지아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는 즉각적인 휴전을 지지하지만, 미국의 결의안이 유엔 결의안에 어울리지 않는 철학적 표현이 희석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초안을 제출했던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린다 토마스-그린필드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국제사회를 호도하고 있다”고도 비난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미국의 비판자들은 이 성명에 휴전이라는 단어가 명시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휴전과 인질 석방을 연결하는 표현이 다소 약해졌긴 했지만 여전히 인질 석방이라는 조건이 암시적으로 포함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날 영국 일간 가디언은“이번 결의안이 미국에게 중요한 어조 변화를 의미했지만, 일부 (외신들의) 헤드라인이 시사하는 것처럼 실질적인 변화는 아니었다”고 전했다.

트리타 부소장도 “이는 이전의 미국의 초안보다는 훨씬 강력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전 미국 결의안이 그랬던 것처럼 가능한 한 빨리 휴전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결의안에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거부권을 던지며 채택은 불발됐다. 결의안이 통과하려면 안보리 이사국 중 최소 9개국 이상, 5개 상임이사국(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전원의 찬성이 필요하다.

표결 후 드미트리 폴리안스키 유엔 주재 러시아 차석대사는 기자들에게 “우리는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지 않는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결의안에 기권한 가이아나의 캐롤린 로드리게스-버켓 외교장관은 “언론 보도와는 달리 이 결의안은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휴전이 인질 석방과 연계되거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배경지식 없이 이 결의안을 읽으면 이 분쟁의 어느 당사자가 가자지구에서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며 “41개 단락, 2036개 단어로 구성된 결의안에서 점령군(이스라엘군)은 두 번째 단락에서 한 번 언급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장쥔 유엔 주재 중국 대사는 미국의 제안은 전제 조건이 있으며 안보리 이사국들과 국제사회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휴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여러 차례의 안보리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모호하고 회피하면서 그런 우회로를 택하고 말장난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가자지구 개전 이후 휴전을 요구하는 세 건의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언급하는 문구가 포함되지 않았고 하마스가 억류하고 있는 나머지 인질 석방과 연계되지 않은 무조건적인 휴전을 촉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출처: 뉴시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출처: 뉴시스)

◆“美이 이스라엘에 보내는 작은 경고”

하마스는 작년 10월 7일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 공격해 1200명을 살해하고 250명을 납치했다. 여전히 100여명이 하마스에 인질로 잡혀있으며 30여명의 유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지난 21일 가자지구의 사망자 수가 약 3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보건부는 사망자 수에서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여성과 어린이가 사망자의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기아 관련 국제기구의 보고서는 지난 주 가자지구 북부에서 “기근이 임박했다”며 전쟁이 격화되면 가자 지구 인구의 절반이 아사 직전까지 몰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로의 원조 물자 유입을 간소화하고, 더 많은 육로 통로를 개방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약 130만명의 난민 팔레스타인인들이 피난을 온 남부 도시 라파로 군사 공세를 옮기겠다고 공언했다. 그곳이 하마스의 거점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최종 결의안은 초안에서 이스라엘의 “라파 공습이 현재 상황에서 진행돼서는 안 된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대신 안보리는 서두에서 “라파에 대한 지상 공격이 민간인에 대한 추가 피해와 잠재적으로 주변 국가로의 추가 이주를 초래할 것이며 지역 평화와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를 강조했다. 문구의 강도가 축소된 것이다.

리처드 고완 국제위기그룹 분석가는 이날 포린폴리시(FP)에 “미국은 전쟁에 대한 유엔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며 “미국이 안보리에서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이스라엘에게 조심하라는 작은 신호”였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이번 미국의 결의안이 실제 통과됐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었을 것이란 비판도 나온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루이 샤보노는 FP에 “결의안이 통과되더라도 작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며 “(미국은) 다른 유사한 안보리 결의안에서 볼 수 있는 보다 강력한 문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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