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지나간 자리

박형준(1966~ )

봄비는

간질이는 손가락을 갖고 있나?

대지가 풋사랑에 빠진 것 같다

꽃보다 먼저 물방울이

나무의 몸을 열고 있다

물방울마다 가득

무지개가 돌고 있다

공원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속에 방울방울 떠다닌다

 

[시평]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다는 춘분(春分)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같다는 사실 이외에, 춘분은 지금까지 우주를 뒤덮었던 음(陰)의 기운이 양(陽)의 기운으로 바뀌는, 그런 분기점이기도 하다. 춘분을 기점으로 하여 우주를 비롯한 이 대지는 따듯한 양(陽)의 기운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

하늘과 땅은 양기에 의하여 서서히 열기를 더하게 되고, 그래서 춘분 이후에 내리는 비는 진정한 봄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양기를 함빡 담은 비가 내리면, 대지는 마치 풋사랑에 빠진 것 같이, 싱그럽고 풋풋해지며, 또 양기를 담고 있는 이 싱그러운 물방울에 의하여 나무는 자신의 몸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봄비는 이렇듯 싱그럽고 풋풋한 새봄을 열어가는, 그런 힘을 지녔다. 그래서 공원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마치 물방울이 떠다니는 듯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봄의 발걸음이다. 밤의 시간보다 낮의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는 춘분, 이 암울했던 음의 기운에서 서서히 밝고 명랑한 양의 기운으로 바뀌는 춘분. 대지도, 나무들도, 사람들도 양기를 함빡 담은 봄비에 촉촉이 젖으며, 모두 모두 저마다의 싱그러운 시간을 열어간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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