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영영’ ‘사랑’ ‘홍시’… 그 많은 지하철역 이름을 단숨에 읊어 대던 ‘수다맨’도 나훈아의 노래들은 다 못 외울 것이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던 아득한 시절부터 반백년이 더 지나도록 우리들을 웃기고 울렸던 나훈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음악으로, 몸으로, 정신과 말로 다 증명해 보였다.

경상도 “싸나이”였던 나훈아는 본명이 최홍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을 냈고, 음반과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도 엄청나다. 노래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호칭이 정말 잘 어울린다. 노래방에 수록된 노래도 가장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선가 ‘물레방아’가 돌아가거나, ‘고향역’으로 달려가거나, ‘18세 순이’를 애타게 부르고 있을 것이다.

나훈아는 어릴 적 야구 선수를 했다. 허구연 KBO 총재가 자신은 경남고에서, 나훈아는 대동중에서 야구 선수로 뛰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야구를 잘 했지만 노래는 더 잘 했다고 한다. 서라벌고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호랑이 작가’ 이목일 화백은 “우이동 골짜기로 소풍갔을 때 홍기(나훈아)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부르자, 소풍 나온 여고생들이 몰려들어 난리가 났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 화백은 그 시절부터 나훈아의 노래는 아주 ‘죽여줬다’고 했다.

노래는 그렇다 치고, 야수처럼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빛이 난다. 잘 다져진 몸매와 꾸며지지 않은 말투, 어설프게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과 배짱, 자잘한 것들에 탐을 내지 않는 관대함도 그의 매력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이가 들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섹시함’을 유지시켜 준 비결일 것이다.

나훈아는 북한에서 공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차례 북한 공연 요청이 있었지만 대부분 거절했다. 2018년 ‘평양 예술단 방북 공연’에 불참한 것에 대해 “고모부를 고사포로 쏴 직이고(죽이고), 이복형을 약으로 직이고, 당 회의할 때 꾸벅꾸벅 존다고 직이뿌고. 그런 뚱뚱한 사람 앞에서 그런 사람 앞에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이라는 ‘사랑’ 노래가 나오겠나”라고 말했다. 그는 “바빠서 못 한다 칸 게 아이고, 때리 직이도 (노래가) 안 나올 낀데 우째 하노”라고 했다.

당시 평양 공연에서 김정은이 “나훈아는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도종환 당시 문체부 장관은 “스케줄이 바빠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도 장관은 이후 “사회주의 체제라 국가가 부르는데 안 온다니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나훈아는 북한에 대한 입장이 분명했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가짜 쇼’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짜뉴스가 가황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김혜수 김선아 등과의 염문설이 돌자, 참다못한 그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불쌍한 두 처자들 시집도 안 갔다. 그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느냐”며 언론을 꾸짖었다. 그리고는 단상위로 올라가 바지 지퍼를 내리는 시늉을 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물론 그 장면을 TV로 지켜본 사람들 모두 혀를 내둘렀다. 성난 사자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훈아는 “아프리카 밀림 다 잘라 불태우니 원숭이 두창인지 세창인지가 오고, 동굴 근처에 아파트를 다 지으니 박쥐가 갈 데 없어 병을 다 옮긴다. 자연을 그만 해치자, 인간들 정신 차리자고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랑 노래만 한 게 아니라 ‘세월은 왜 저래, 테스형~’ 하면서 사회문제에도 날카롭게 반응했다.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순 없었지만, 흐트러진 우리들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기쁠 때, 슬플 때, 기가 죽었을 때, 기사 살아날 때, 흘러간 사랑이 생각날 때,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낄 때,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고향의 언덕이 그리울 때, 그 때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주 고마운 가황이었다.

가황이 노래를 그만할 것이라고 세상에 알렸다. ‘고마웠습니다!’라며 팬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우리가 더 고맙다. 억수로!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