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다. 쓸쓸하면서도 정다운, 나그네 걸어가는 풍경이 펼쳐지고, 술처럼 가슴이 익어 훈훈해지는, 명작이다. 우리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부르고 읊었을 민요 한 자락 같은, 정다운 시다. 눈물 속에서도 술 빚어 위안 삼을 줄 알았던 소박하고 정겨웠던 시절의 풍광이 되살아나고, 소나기 쏟아지자 훅 밀려오는 흙냄새처럼 토속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나그네’는 목월의 초기작으로, 1946년 조지훈·박두진과 함께 낸 시집 ‘청록집(靑鹿集)’에 실렸다.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화답한 시인데,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놀이여’라는 ‘완화삼’의 일절을 부제로 달았다. 목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목월은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하다. 학교에서도 시인과 시에 대해 많이 배우고 읊었다. 정겹고 가슴 따뜻한 시들은,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울림을 주었다. 아이들도 으레 박목월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며 존경했다. 윤이상 등 많은 작곡가들이 예술 가곡으로 만든 작품도 목월의 시(詩)다.

목월의 본명은 박영종(朴泳鍾)으로, 목월은 필명이다. 그가 좋아했던 수주(樹州) 변영로의 호(號)에서 ‘수(樹)’자에 포함된 ‘목(木)’과 김소월의 이름 소월(素月)에서 ‘월(月)’을 따 지은 것이라 한다.

목월은 1915년 1월 6일 경상북도 월성군 건천읍 모량2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그곳에는 그의 생가와 문학관이 마련돼 있다. 생가 옆으로 ‘앞 그랑’이라 불렸던 작은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찬 웅굴’이라 불렸던, 일 년 내내 찬 물이 샘솟아 올라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길어 나르던 샘이 있었다.

복원된 지금의 생가는 목월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냈던 원래의 집과는 차이가 난다. 제법 그럴듯하게 살았던 집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의 공법으로 집을 짓고 터를 넓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시인의 감성이 싹트고 순이 자라고 잎이 되고 꽃으로 피었다.

모량리는 자그마한 농촌 마을이었다. 뒤로 ‘대베기’라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철길이 놓여 있었다. 이후 철길과 나란히 경부선 고속도로가 놓였다. 철길 건너 그 지역 사람들이 ‘큰 그랑’이라 불렀던 강이 흘렀다. 그 강 건너, 다시 들판이 펼쳐진다. 그 고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이 그곳이 아닐까, 짐작해 보기도 한다.

목월의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도 고향 건천읍 모량리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모량초등학교 앞 신작로를 건너면 ‘큰 그랑’으로 가는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모량교회가 있다. 목월이 살던 시절부터 있던 그 교회가 아직도 있다. 그곳에서 목월의 가족들은 신앙심을 키웠다.

목월은 동시 작가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초기에는 동시를 많이 썼고 그 중에는 동요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하는 ‘얼룩소’도 그중 하나다.

가곡으로 만들어져 가장 애창된 곡 중 하나는 ‘이별의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가사가 처연하다. 김성태가 1952년 한국전쟁 당시 대구 피난지에서 작곡했다. 사랑과 관련한 목월의 개인적 사연이 담긴 시로, 역시 김성태 곡으로 탄생한 ‘산유화’와 함께 국민들이 가장 많이 애창했던 작품이다.

순수하고 정갈한, 우리들 마음과 영혼까지 말갛게 씻어주었던 목월의 시가 수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운동권이라는 자들이, 목월을 ‘술 익는 마을을 노래한 현실 도피적 시인’이라거나 ‘반민중적 음풍농월(吟風弄月)의 대표적 시인’이라며, 헛된 이념으로 작품세계를 짓밟았다. 중국의 홍위병들처럼, 야만적인 가짜 혁명가들이, 고귀한 시인의 문학적 성취와 인생을 이념의 잣대로 마구 난도질했다.

그럼에도, 목월의 시는 한국 문학사에, 우리들 가슴에 불멸로 남을 것이다. 목월의 미발표 시들이 한꺼번에 많이 발견돼, 오는 6월 책으로 묶여 나온다고 한다.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는 24일은 목월의 46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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