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예전에 알랭 드롱이라는 아주 유명한 배우가 있었다. 이 배우의 대표작이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다. 잘생긴 외모에 구릿빛 상체를 드러낸 채 요트의 키를 잡고 있는 그의 모습이 세계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곳곳에 알랭 드롱의 사진들이 돌아다녔다. 여학생들은 책갈피 속에 숨겨 둔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방의 남자를 사랑했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배우가 알랭 드롱이라 했고, 어른들은 세상에 그런 희한한 이름이 어디 있냐며 믿지 않았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는 프랑스 르네 클레망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1960년에 발표됐다. 알랭 드롱이 주인공 리플리 역을 맡았다. 신인이었던 알랭 드롱은 이 작품으로 일약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1999년에는 맷 데이먼과 귀네스 펠트로 주연의 ‘리플리’로 재해석돼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MBC에서 ‘미스 리플리’라는 16부작 월화 드라마로 제작, 방영됐다. 김승우 박유천 강혜정 등 주연 배우들의 호연으로 인기를 모았다.

‘태양은 가득히’는 미국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를 원작으로 했다. 소설은 1991년까지 36년에 걸쳐 5부작으로 완결됐다. 소설 속 주인공 톰 리플리는 야심이 크고 머리가 좋다. 하지만 스스로 성취할 능력도 배경도 없다. 도덕관념도 모자라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거짓말은 기본이다.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는 리플리는 친구이자 사교계 명사인 친구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친구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남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즐겁다. 하지만, 친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리플리는 자신의 상상 속에 허구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충족되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 만든 가상의 세계를 진짜로 여긴다. 현실의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가상의 세상만이 진실할 뿐이다. 그러니, 말도 행동도 이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것을 이상하거나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일종의 심리적 장애로, 의학용어로는 ‘공상 허언증’이다. 자신에게 부족하고 결핍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거짓으로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하고, 거짓말에서 위안을 느끼며, 사실과 거짓말의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욕망은 큰 데, 능력이 받쳐주지 않는 사람에게 잘 발생한다.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거짓말을 일삼게 되고,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행동하게 된다. 죄의식도 없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된 진실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허구의 세상이 깨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970년대부터 정신과 의사들은 이 리플리 증후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허언증’은 리플리 증후군과 비슷하다.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하고, 죄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다. 이 역시 병이다. 재산 같은 물리적 이익뿐 아니라, 남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위해 허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희한한 것은, 허언증 환자가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 탐지기도 잡아내지 못한다. 허언을 하는 사람에게 허언은 허언이 아닌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리플리’들과 허언증 환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딴 세상 인간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거나,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인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리플리’들과 허언증 환자들이 각설이 패거리처럼 떼로 뭉쳐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핏대를 세우고 있다. 옳고 그른 것은 내 알 바 아니고, 내 편이냐 네 편이냐, 요것만 따지고, 내 편이면 무조건 옳고, 네 편이면 죽일 놈이 된다. 죗값을 치르는 대신 명예를 되찾겠다고 벼른다.

보고 질주하도록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한 쪽만 보도록 생겨 먹은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덮어 놓고 옹호하고 지지하는 자들을 믿고, ‘리플리’와 허언증 환자들이 살 판 만났다며, 신바람을 내고 있다. 심판받아야 할 자들이 심판하겠다며 죽창을 들고 나서는, 기이하고도 무섭고, 얄궂은 세상이다. 심판의 날은 오기나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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