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했다. 봄도 그러하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기어코 오고야 만다. 계절은 어김없이 왔다가 간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지는 것처럼, 자연은 그렇게 제 순리대로 돌아간다. 가고 오는 것은 계절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러하고 시절도 그렇다. 올 것은 오고야 말고, 갈 것은 반드시 가고야 만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이성부 시인이 남긴 대표작 ‘봄’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기필코 누군가는 읊조려 보는 고운 시다. 시인은 생전 산을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산에 올랐다. 세상의 너절한 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 산을 찾았지, 싶다.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짐작하자면, 그렇다. 해서 시인의 시에는 산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의 ‘산(山)’이란 시도 그중 하나다.

‘산을 가자/우리를 모래처럼 부숴버리기 위해 가자/산에 오르는 일은/새롭게 사랑 만나러 가는 일/만나서 나를 험하게 다스리는 일/더 넓은 우리 하늘/우리가 차지하러 가고/우리가 우리를 무너뜨려/거듭 태어나게 하는 일!/산을 가자/먼 발치로 바라보는 산이 아니라/가까이서 몸 비비러 가자/온 몸으로 온 몸으로/우리 부숴지기 위해서 가자’

시인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수고 무너뜨리기 위해 산에 간다고 했다. 부수고 무너뜨리지 않으면 거듭 태어나지 못하니, 온 몸을 산에 비비고 비벼서 부수고 또 부숴야 하는 것. 시인은 자신뿐 아니라 세상도 그렇게 부숴지고 무너져 거듭 태어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다시 난지도(蘭芝島)에서’란 시를 썼을 것이다.

‘죽자 사자 문학에 매달리는 놈들을 보면/난지도 쓰레기더미 파리 떼 생각이 난다/이것이 무슨 신성(神聖)이나 되는 것처럼/이것이 무슨 한산 세모시, 보물단지, 귀한/말씀이나 되는 것처럼/목에 힘주며 소리치며 핏대 세우며/고개 숙이며 눈물 짓고 한숨 짓고/혹은 고상한 척 거들먹거리면서/이것이 무슨 준엄한 교훈이나 되는 것처럼/흙탕물 속에서 혼자만 의젓해도 때묻지/않을 것처럼/문학에 매달리는 놈들을 보면/마치 동물의 공화국에서/정치를 하는 돼지처럼/대학교수나 신문기자를 하는 여우처럼/예술쟁이 예수쟁이/늑대들처럼/골방에 박혀 혁명이나 꿈꾸는 놈들처럼/은(銀) 서른 개를 받아/안도의 한숨 쉬고 괴로워하고/마침내 목매달아 죽는 놈들처럼/TV에 잘 나오는 말 잘하는/그렇고 그런 놈들처럼/밥처럼 죽처럼 개처럼···’

시인은 문학하는 사람들 하는 짓들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러한 시절이 있었다. 문학이 권력처럼 위세를 부리고 그들끼리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떼를 지어 패거리 세력을 뽐내고 주머니를 채우고 배를 불렸다.

문학처럼, ‘죽자 사자’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득실대고 있다. 여전히 세상은 ‘동물의 공화국’에서, 돼지처럼 정치를 하고, 여우처럼 대학교수나 기자를 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제 배를 채우고 결국 제 손으로 목을 매 죽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죄 지은 자가 뉘우치기는커녕 앞머리 휘날리며 금배지 달겠다고 결기를 보이고, 허물 있는 것들이 서로의 허물을 들추고 욕을 해대며 핏대를 세운다. 누이, 동생 하며 장미꽃을 주고받으며 우애를 자랑하던 자들이 돌연 서로의 탓을 하며 적의를 드러내고, 국민을 속여먹으려는 야바위꾼 같은 것들이 국민의 뜻 운운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규칙을 만들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봄이 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뻘밭’이고 ‘썩은 물웅덩이’다. 봄처럼,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기는 하는 걸까. 바람은, 봄바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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