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여름철 땀을 많이 흘리다 보면, 덩달아 입맛도 잃기 쉽다. 이럴 때 식은 밥이나 막 뜸을 들인 더운밥을 떠서 물오른 싱그런 상추 위에 한 숟가락 올리고 그 위에 ‘강달이젓’을 얹어 입 안에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어보자. 잃었던 입맛이 거짓말처럼 살아나며 기운이 불끈 솟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강달이(江達-)’는 충청남도 아산만의 특산물이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149권 ‘충청도 청주목 아산현(牙山縣)’에 토산물로 “주로 민어·숭어·참치·망둥이·황숭어·세미어(細尾魚)·큰새우·중새우가 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세미어가 바로 ‘강달이’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청도 신창현(新昌縣) 토산으로 ‘강달이’인 세미어가 나온다. 그런데 옛 신창현도 지금의 아산시(牙山市)에 속한다.

참조기·수조기·부세·민어 등과 함께 민어과에 속하는 강달이 종류를 보면, 배가 황금색을 띤 황강달이, 눈이 큰 눈강달이, 민강달이 등이 알려져 있다.

정약전(丁若銓)은<자산어보(玆山魚譜)>에 조기·보구치·반애·황석어 등을 모두 조기로 분류했다.

간혹 조기 새끼를 강달이의 한 종인 황강달이로 헷갈리기도 하지만 차이라면 조기 새끼에 비해 머리가 크고 머리에 돌기가 있다.

강달이는 15㎝에서 20㎝ 내외로 오뉴월에 산란을 한다. 그 모양새가 7월에서 9월에 안강망 그물에 많이 잡히는 조기 새끼와 흡사하다.

일본명 ‘メブトカンダリ(Mebutokandari)’는 우리나라 방언인 강달이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큰 강의 하구와 내만, 또는 수심 90m 미만의 연안에 서식하고, 주로 작은 새우류, 젓새우류 등 갑각류를 먹는다. 산란기는 5~6월이며, 산란기에는 강의 기수 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란하는데, 특히 아산만 걸매포구 앞바다에서 산란한다. 이 종은 저층트롤어업과 정치망어업 등에 의해 부수 어획되며, 성어기는 12~3월이다. 알은 무색, 원형인 침성란이고 수정 후 8시간이면 떠오른다. 난경은 1.1~1.2㎜이고 부화시간은 수온 20.2~21.9℃에서 34시간 정도 걸린다.

주로 아산만 지금의 삽교천 방조제 앞쪽인 소당벌과 진강벌 부근에서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따라 물 흐르는 가늘게 다듬어 깎아서 박는 나무 말뚝 즉 길목에 박아놓은 말장에 그물을 쳐놓고 잡았다. 많이 잡힐 때는 여러 척의 배에 매일 산같이 쌓이도록 잡았다.

해마다 강달이 산란기가 되면 예산·당진·아산·천안·평택·안성 등 충청남도 북부와 경기도 남부 각 지역에서 걸매리와 공세리의 포구에서 현금과 보리쌀, 콩, 잡곡을 가져와 구매하여 마차·자전거·지게 등으로 각 지역 장터로 운반하여 판매하였다.

황석어와 달리 강달이로는 젓갈을 담지 않고 햇볕에 통째로 말렸다. 주로 추녀 밑 담장에 발을 쳐서 말리는데 해가 지면 졸여 먹거나 구워서 먹기도 하였다. 완전히 말린 강달이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는 맛있는 간식이었다. 강달이의 말린 알은 숭어알과 함께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인기 있는 안주와 간식거리였다.

강달이 가격은 주로 보리쌀을 기준으로 했는데, 1960년대에는 보리쌀 한 되에 20~30마리 정도로 그리 비싸지 않았다. 특히, 강달이는 기름이 많아서 끓이면 기름이 노랗게 뜨는데 시금치, 마늘잎, 고추장을 넣고 끓였다. 찜으로도 먹고 구워도 먹었는데 강달이찌개는 단연 최고의 음식이었다.

이 강달이가 1960년대 초에 갑자기 아산만에서 사라졌는데. 그 원인을 특정할 수 없고 2018년을 기준으로 아산만에서는 볼 수 없이 멸종했다.

그렇지만 아산만에서 사라진 강달이가 전남 신안의 비금도와 자은도 그리고 임자도 앞바다에는 찾아들었다. 

신안군에서는 60여척의 배가 강달어(강달이)를 조업 중이며, 매년 6월이면 ‘섬 강달이 축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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