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1992년,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아득한 시절, 참 재미난 일들이 많았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뜨면서 보고 듣고 즐길 거리가 엄청 늘어났다. 1980년대의 암울한 시절이 지나고 마침내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란 희망에 부풀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이 스포츠로 민심을 누르려 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 무렵 대한민국 스포츠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겨울에는 농구장 배구장에 관중들이 자리를 꽉 채웠고, 봄 여름 가을에는 축구장에 모여 응원을 했다. 지금처럼 외국인 선수가 없었지만, 재미는 더 있었다.

지금 아이들은 방송 연예인으로 알고 있는 허재는 당시 농구 대통령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량이 출중했다. 연세대의 문경은 이상민도 오빠 부대를 거느리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내 몬주익의 영웅으로 불렸다. 국내와 해외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스포츠 위상은 급상승하고 있었다.

부산을 연고지로 한 롯데는 이 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부산 갈매기들은 신이 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 퍼졌다. 투수 염종석은 안경잡이 투수로 고졸 신화를 이루었고,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은 40개 넘는 홈런을 때려 국민 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나고 즐거운 일들이었다.

거리에서 돌덩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내려쳐 깨는 등 기이하고도 놀라운 차력 시범으로 회충약 따위를 파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없지만 그때만 해도 기차 역이나 버스 터미널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약을 먹은 아이의 엉덩이에서 회충이 나와 구경 나온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볼거리 놀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약장수 약 파는 구경도 재미났다.

약 장수들은 “애들은 가라”며 정력에 좋다는 뱀 따위를 팔았다. 가라고 진짜 가는 애들은 없었고 끝장이 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구경했다. 1990년 대 들어 약장사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즐길 거리들이 늘어났다. 축구장 야구장 농구장 배구장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십대 어린 관중들이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을 신나게 만든 건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1992년 봄,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의상과 음악으로 무장한 서태자가 TV에 나오자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현철과 주현미 태진아 등 세상에 트로트만 있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기상천외한 음악과 패션에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지경이었다.

서태지는 대한민국 가요 판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방송사 피디와 음반 제작사 사장들이 주도권을 쥐고 뮤지션들을 거의 노예 취급했던 관행을 깬 것도 서태지였다.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무대를 꾸며 공연을 하고 방송 출연도 스스로 결정했다. 방송사 피디들 눈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워낙 거물급이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서태지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거침없이 발언하고 노래로 만들었다. ‘발해를 꿈꾸며’ 등 국가적인 염원을 담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교실 이데아’ 같은 노래는 대한민국의 한심한 교육 현실을 풍자했다. 기성세대들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태지는 서태지다웠다. 영국의 전설 뮤지션 비틀즈가 시종일관 평화와 사랑에 대해 노래했듯이 서태지는 끊임없이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지적했다. “너희들은 모르고 있었지? 난 다 알고 있어!”라고 외치는 듯 ‘난 알아요’로 전격 데뷔한 서태지는 시대의 양심이었고 새로운 물결이었다.

1992년 그 시절에도 꼰대들이 존재했고 서태지는 그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저항했다. 문화 대통령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1992가 우리들 눈에 들어왔다. 설왕설래 말들이 많지만, 그때 서태지처럼, 두려움 없이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길, 그래서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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