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송년회 모습 속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평소 출석률이 썩 좋지 않던 동창회에 엊그제 다녀왔다. 서울 모 호텔에서 열린 대학 송년회엔 재담 넘치는 개그맨 사회자와 요정 원조로 불리는 아이돌 여가수, 뜨고 있는 트로트 가수 등 동문 연예인들이 3부 공연무대를 장식해 흥겨움을 더해줬다. 참석자 이탈을 최소화하려는 듯 푸짐한 상품을 나눠주는 경품 추첨이 마지막 순간까지 수시로 이어졌다. 폭탄주를 마시며 흥청대던 예전의 흔한 풍경은 사라지고 품위와 격조 있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뒤끝은 뭔가 허전했는데, 오랜만에 동문을 만나 회포를 풀기보다 공연장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 더 강렬해서 그런가 싶다.

어느 선배가 “이제 송년회에 불려 다니는 게 아니라 선택하거나 편한 환경, 좋아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에만 가겠다”고 선언했다. 시, 그림, 연주, 공연이 있는 송년회나 모임만 찾아다니는 사진과 글을 SNS에 올린다고 한다. 문화예술에 치유와 사랑의 효과의 힘이 가득하고, 행복과 평화의 생활을 가능토록 한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는다. 맞는 말 같다.

동문 연예인들과 한바탕 놀이를 한 송년회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다. 하루하루 즐기는 인생을 MZ세대 언어로 ‘갓생’이라 하던가. 각종 회식, 송년회, 종무식, 시무식 등을 분주하고 정신없이 다니던 직장 시절을 생각하면 다른 세상이다. 순간의 행복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욜로(Yolo)족, ‘오늘을 잡아라. 현재를 즐기라!’고 외치는 카프레 디엠(carpe diem), 니체의 ‘내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선호하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들로 넘쳐난다.

원시시대 축제에서 보듯 놀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하지만 결은 달라졌다. 자연과 신에 대한 숭배가 아닌 재미 추구를 통해 만족을 극대화한다. 소비행동연구자 김난도 교수는 “새롭고 재미 있는 것을 경험할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모으려는 요즘 사람들의 행동”을 ‘도파밍(dopamine과 farming 결합)’이라고 명명했다. 그가 2008년부터 매년 출간하고 있는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토정비결처럼 해가 바뀔 때마다 나에겐 필독서다.

그가 몇 년 전부터 신년 10대 키워드로 꼽은 ‘나나랜드(그곳만이 내 세상)’ ‘편리미엄(편리한 상품과 서비스 선호)’ ‘오하운(오늘 하루 운동)’ ‘득템력(향유 소비력)’ ‘헬시 플레저(맛있고, 즐겁고, 편리한 건강관리)’ 등 신조어들은 한결같이 놀이를 추구하는 소비심리를 잘 포착하고 있다. 2024년 핵심어 ‘도파밍’이 과해 농작물 수확하듯 즐거움만 쫓다 자칫 자극적인 쾌락에 중독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긴 하다.

이런 걱정을 기발한 작품으로 승화한 젊은 예술가들이 있다. 한국을 찾은 악동 아티스트 집단 ‘미스치프 MSCHF’의 전시회 ‘신성한 것은 없다’는 장난질로 세상을 비꼰다. 일약 세계적 크리에이터로 떠오르며 ‘인터넷 뱅크시’라는 별칭을 얻은 미스치프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조각내고, 앤디 워홀의 작품을 999개로 복사하는 등 기이한 창작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얼마 전 개막한 서울 대림미술관의 미스치프 전시회에 가보니 ‘유쾌한 장난짓’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든 작품들로 넘쳐났다. 세계 명품브랜드의 지적 재산을 허가 없이 도용한 ‘반체제 가치’ 작품, 반칙행위를 선동하는 온‧오프 프로그램 등 장난기 가득한 풍자로 자본주의 실상을 경고한다.

세계 각지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모은 ‘스크림 클럽 Scream Club’, 기업 매칭 기부전략 프로그램 ‘도네이트 Donate 2X’, 전화번호를 조합해 전화를 걸어 연락처를 추적하는 ‘화이트 웨일 White Whale’ 등의 작품을 보면서 뜬금없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홍익인간이 떠올랐다. 마고할머니의 거처 마고성에서부터 환웅이 세운 신시, 단군왕검이 살던 아사달에 살 때까지 홍익인간임을 잊지 않고 세상 가치를 나누며 함께 살았던 한민족의 유전자가 아직 살아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출판계에 ‘쇼펜하우어 신드롬’이 불고 있다. 쾌락 추구의 다른 한편에 마음을 중시하는 호모 루덴스의 지혜가 있다. 200년 전 ‘꼰대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전해준 조언 중에서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 낭비하지 마라’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가 귀에 꽂힌다. 무의식이 이끄는 본성을 찾아 ‘거지 같은 하루’를 ‘경이로운 하루’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과 통한다. 계묘년의 검은 토끼를 보내고 갑진년 청룡을 맞이하더라도 홍익스런 즐거움이 늘 곁에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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