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테네스는 이 섬으로 도망쳤다. ‘테네시안 도끼’라는 말도 있다. 나중에 테네스의 무죄를 안 아버지가 화해하려고 테네도스로 왔다. 그러나 화가 풀리지 않은 테네스는 도끼로 항구에 정박한 아버지의 배에서 밧줄을 끊었다. 부근의 아소스섬에서 3년 동안 철학을 가르치고, 아들 니코마스를 얻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속담이 테네스의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말했다. 다른 버전의 전설도 있다. 테네도스 왕은 간음한 자를 도끼로 죽인다는 법을 선포했다. 자신의 아들도 용서하지 않았다. 쌍날도끼는 이곳 말로 Labrys라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신성시된 라브리스는 테네스가 살았을 시기 이전부터 있었다. 이러한 도끼는 미케네와 크레타에서도 발견됐다. 더 이른 것은 BC 3천년 경, 아나톨리아의 트로이, Bogazcoy, Arslantepe 유적지에서 발견됐다. 상징으로서의 쌍날도끼는 BC420년경 테네도스 주화에서도 보인다. 이 동전의 다른 모티프는 포도송이로 이는 이 섬에 술의 신 디오니소스 신앙이 유행했다는 증거이다.

디오니소스와 상대적인 아폴론 숭배도 유행했으며, 아폴론 신전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신전 유적지는 아킬레우스가 창으로 테네스를 죽인 곳으로 알려졌다. 트로이 전쟁 시기에 아카이아인이 테네스로 왔다. 테네스는 돌을 던지며 자신이 트로이편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자 아킬레우스가 그를 죽이고 테네도스를 파괴했다. 이는 당시 이 섬의 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의미이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테네스가 피살된 자리에 아폴론 신전을 지었는데, 규율에 따라 테네스를 무고했던 플루트 연주자는 입장이 금지됐다고 한다. 또 신전에서는 아킬레우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도 금지했다고 한다. 이는 아폴론 신전이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테네스까지 신격화했다는 증거이다. 이 섬은 미녀가 많고, 은으로 만든 그릇, 유약을 바른 도자기로도 유명했다. 호머를 비롯한 고대 자료에 따르면, 이 섬은 그리스인들이 트로이를 공격할 때 기지로 사용했다. 섬이 파괴되고, 주민들이 잡혀간 후, 레스보스섬에 살던 에올리안(Aeolian)들이 여기에 정착했다.

테네도스와 칼케돈 사이에는 오랜 정치적, 종교적 교류가 분명히 존재했다. BC2~3세기 비문에는 칼케도니아인들이 이 섬에 정치적 망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는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다. 테네도스는 가장 먼저 페르시아군에게 점령됐다. 아테네가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를 격파한 후, 아테네가 다시 이 섬을 점령했다. 테네도스는 매년 3~4달란트의 금을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금 1달란트를 지금의 화폐로 환산하면 약 20억원에 해당하므로 작은 섬으로서는 매우 가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레스보스는 스파르타에게 점령됐지만, 테네도스는 여전히 아테네가 통치했다. 그러나 BC389년, 코린토스 전쟁에서 테네도스는 스파르타인에게 파괴됐다가 곧바로 페르시아로 넘어갔다. 나중에 알렉산더가 되찾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집정관 아르콘(Archon)이 정복했다. BC2세기에 테네도스는 로마와 동맹을 체결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의 도로스 함대가 테네도스에 정박했다가 마케도니아의 필립왕이 포위한 아비도스(Abydos)곶을 공격했다. BC1세기까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던 테네도스는 스스로 알렉산드리아나 트로이의 신민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지쳤다.

500년이 지난 473년과 491년에 잇달아 엄청난 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주민이 죽고 섬은 완전히 황폐해졌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제4차 십자군이 이 섬을 점령했다. 테네도스는 램노스(Lemnos), 사모드라게(Samothrace)와 함께 십자군이 부여한 특권을 누렸다. 1303년에는 해적이 침략했지만, 제노바인 Andears Murisocos가 두 척의 전선을 이끌고 와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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