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통영에 살던 한 꼬막 채취 어부는 1973년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그는 30년 동안 북한에서 살다 탈출, 지난 2003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납북 당시 생후 백일도 안된 딸은 어엿한 성년이 됐고 꽃 같았던 아내는 중년의 나이가 됐다.

고향에 돌아온 기쁨도 잠시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가 걱정됐다. 북한당국은 그를 강제노역에 종사시키면서 정착하도록 결혼을 시켰다.

30년을 북한에 살았으니 자식도 생겼다. 어부는 북한을 탈출하면서 북한 아내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딸을 두고는 혼자 갈 수 없다고 하며 눈물로 헤어졌다고 한다.

어부는 고향에 돌아온 후 북한에 남겨 둔 처자식을 매일 그리워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북한의 가족에게 죄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통영집 아파트 화단에서 발견된 어부는 머리를 크게 다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북한의 가족들을 만날 수 없다는 절망과 회한으로 살다 어부는 올해 70세의 나이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 어디 통영 어부만의 아픔인가. 한 겨레 두 나라의 비극사가 이 어부만의 슬픔인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는 6.25로 갈라진 형제의 비극을 그린 영화였다. 형은 인민군, 아우는 한국군이 돼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다. 어쩌다 한 조국이 쪼개져 골육상쟁을 해야 하는 운명을 겪게 된 것인가.

지금도 북한에 가족과 부모를 두고 남한으로 온 이산가족의 비극사는 대물림되고 있다. 지난 1988년부터 올 9월 30일까지 남북이산가족 찾기 신청현황을 보면 모두 13만 3708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8월까지 270명이 또 세상을 떠났다. 이산가족 생존자는 현재 10명 가운데 7명이 80대 이상 고령자들이라고 한다. 70대가 7400명, 80대가 1만 4천명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90세 이상이 1만 2천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남한으로 내려와 북한의 가족들을 그리며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이산가족 분단의 역사 50년(James A. Foley)’에 나오는 대목이 이산가족들의 슬픈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이산가족들은 생사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상심이라고 했다.

‘이산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요소는 바로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83%의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비록 3% 소수의 사람들만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여전히 88%의 많은 사람이 꼭 그들과 만나고 싶다고 답했다.’

세상을 눈물바다로 만든 것은 지난 1980년대 초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였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간 5만 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을 소개했으며 그중 1만 189건의 상봉이 이뤄졌다.

방송 도중 이산가족들이 만날 때마다 전 국민이 함께 박수를 보냈다. 한반도는 물론 세계에 나가 있는 교민들도 눈물을 흘렸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남북한은 하루빨리 대화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우선 90세 이상의 고령층 이산가족부터 만나게 해야 한다. 북한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책임이 있다.

북한은 핵무장을 해제하고 국제 사회로 나오는 일대 결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우리 민족을 위하고 북한 동포를 기아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길이다. 한민족 두 나라 비극은 이 시대에 끝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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