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 법적으로 공용화한 것은 459년 후인 대한제국 고종 9년(광무) 1905년이었다. 고종황제는 칙명을 통해 모든 관공서의 공문이나 서식을 한글로 쓰라고 명을 내렸다.

언문이라고 비하해 안방 여인들의 내간으로만 사용하던 한글이 제대로 국문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우리글이면서 역대 임금들의 유시나 선비들의 상소, 저서에 한글 쓰기를 꺼려 했다.

그런데 첫 한글 공용 이후 조선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비분강개한 충정공 민영환공의 자결이었다.

민충정공은 당시 고종황제를 측근에서 보좌한 탁지부 대신의 위치였다. 공은 여러 차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상소하고 파기를 촉구했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1월 30 일 유서를 써 놓고 청지기의 집에서 자결한다.

공의 유서는 사전에 한글로 써 서울주재 여러 외국 공사관에 보내졌다. 자결 현장에서는 작은 명함에 한문으로 유서의 내용을 적었다. 민충정공의 유서 내용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 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 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동포들과 젊은 청년들에게 보내는 간곡한 충정의 당부 글이었다. 한문으로 쓰면 외국공사들이 읽는 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미리 한글 유서를 써 우편으로 공관에 보내고 현장에서는 명함에 한문으로 같은 내용을 써 남겼다.

필자는 3년 전 한글로 된 민충정공의 유서를 서울의 고서적상 간찰더미에서 찾아 이를 천지일보에 단독 발표했다. 이 한글유서는 당시 외국 공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글이 공용 인정된 후 ‘일본 제국주의를 이기고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라’는 간곡한 유언이라는 점에서 큰 감동을 준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이후 한자숭배 일색의 사회통념에 부딪혀 이를 적극 상용화하지 못했다. 다만 불경의 국역 간행을 통해 백성들에게 실용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학자인 아들 수양대군과 국사 신미 등을 가까이 하며 불경의 한글 번역화에 노력했다.

왕비 소헌왕후가 별세하자 개경 불일사에서 귀한 옥을 구해 방대한 월인석보 옥경을 각자해 봉안하기도 했다. 옥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귀한 보물. 왕비의 극락왕생과 위기에 처했던 한글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충정이 아니었을까. 한글날을 맞이하면 필자는 이 두 가지 감동적인 역사적 사실을 상기 하곤 한다.

한글의 과학성과 편리성은 세계 언어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섬마을 찌아찌아족은 한글 수출 1호로 유명하다. 현재 전 세계 60개국 180곳에 세종학당이 운영되고 있으며 연간 5만 7000여명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나라 중 가장 많은 숫자는 태국으로 2만 5000명이나 된다.

민충정공의 유언대로 고난의 역사를 이기고 세계 6위로 우뚝 선 ‘자유 대한민국’. 그 바탕에는 우리글이 원동력이 되었기에 한글날을 맞는 감동이 더 크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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