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여명 사망… 수십만 피난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 오명
데비 집권 후 반군 세력 약화

저강도 무력충돌 중심으로 전개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 위협
외부세력 개입에 분쟁은 여전

외신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굵직한 이슈 중 분쟁과 전쟁은 단골손님이다.그중 종교분쟁은 사상‧이념‧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양상을 보이곤 한다. 대표적인 종교분쟁으로 꼽히는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당사자인 소위 ‘이팔 분쟁’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개신교 등 굵직한 종교가 얽혀 성지를 놓고 다툼을 한 지 벌써 75년이다. 이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가 얽힌 분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것일까. 본지는 기획 연재를 통해 각국 종교분쟁을 조명하고 분쟁의 심각성을 재조명하고, 평화의 필요성을 살펴본다.

2022년 10월 20일 중앙아프리카 차드 수도 은자메나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도로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 불을 붙인 후 보안군과 대치하고 있다. 차드 정부 대변인은 “차드 보안군이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해 최소 60명이 사망했다”라고 밝혔다. 시위대는 마하마트 이드리스 데비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시위 중 보안군과 충돌했다. (출처: AP=뉴시스)
2022년 10월 20일 중앙아프리카 차드 수도 은자메나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도로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 불을 붙인 후 보안군과 대치하고 있다. 차드 정부 대변인은 “차드 보안군이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해 최소 60명이 사망했다”라고 밝혔다. 시위대는 마하마트 이드리스 데비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시위 중 보안군과 충돌했다. (출처: AP=뉴시스)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반세기에 달하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아프리카 중부에 위치한 차드공화국이다.

차드 내전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랜 분쟁 중 하나다. 내전은 1966년 차드에서 기독교도 남부 차드인과 이슬람교도 북부와 동부 차드인의 대립으로 시작돼 1990년까지 24년간이나 지속됐다. 끝난 줄 알았던 내전은 무력충돌이 지속되면서 국가 분쟁으로 비화됐다. 이 같은 내전에 차드는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률이 전 세계 3위일 정도로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 발표에 따르면 2017년 9월 기준 5만여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십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차드는 이슬람권 최대 국제기구인 이슬람협력기구(OIC) 회원국이고 인구 1500만명 중 절반가량이 이슬람 신자다. 종교는 통계수치에 따라 차이가 다소 발생하긴 하나, 이슬람이 50~55% 정도를 차지하고 종파적으로는 대부분 수니파에 속한다. 차드가 1970년대 후 아랍권 국가로 변모하면서 차드의 기득권층들 역시 아랍계 무슬림이 차지하게 됐다.

제2의 종교는 기독교로 프랑스화된 남부 지역에서 신봉되며 40~45% 정도를 차지한다. 기독교 인구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반반씩 양분하고 있다. 가톨릭은 주로 프랑스의 영향인데 과거 차드의 기득권층들이 가톨릭 신자였다. 기독교인들은 남부 지역에 퍼져 있으며 내전이 장기화돼 나라가 파탄나자 많은 사람이 프랑스와 벨기에로 망명해서 떠났다.

차드 내전의 핵심 원인을 종교라고 내세우지만, 사실상 식민지배의 유산과 국가통치권 차지를 위한 지역 간의 갈등 충돌, 수단과 리비아의 영향으로 인한 불안요소 작용 등으로 볼 수 있다. 타국가의 분쟁들도 마찬가지지만, 차드 내전도 이를 지원하는 주변국과 외부세력이 개입되다보니 종식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남부 기독교 세력 vs 북부 이슬람 세력

내전이 일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차드에서는 국가의 통치권을 놓고 정권을 잡은 남부의 기독교파와 북부와 동부 이슬람파의 남북 대립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 사이 1966년 차드 북부세력이 반정부 단체인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을 구축, 남부 출신이 주류인 정부군과 무력투쟁을 개시함에 따라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민족해방전선은 식민주의 타도, 민주연합정부 수립, 모든 외국군 기지 폐쇄를 표방하며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1978년 11개 주요 종족 간의 합의로 통합과도정부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1979년 쿠데타에 의한 우에데의 집권, 문두시에서의 종교분쟁으로 회교도의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통합과도정부부는 와해되고, 당시 국방장관 아브르가 반정부 북부군(FAN)을 이끌고 우에데 정부와 무력충돌, 1982년 수도 은자메나를 점령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3년 우에데가 리비아의 군사개입을 요청하고, 이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으로 차드 내전은 국제대리전 양상으로 변질됐으며 차드는 소위 적색선을 중심으로 아브르 통치지역과 우에데 통치지역으로 양분됐다.

이에 남·북 대립으로 시작된 이 분쟁은 차드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는 리비아와 정부를 지원하는 프랑스의 개입으로 확대됐다.

◆주변국·외부세력 개입에 분열 심화

1979년 정전협약이 카노협정을 체결하고 주변에 근접한 리비아, 수단,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나이지리아, 카메룬 등 5개국의 조정으로 북부 이슬람 세력 주도의 잠정국민연합정부가 설립됐다. 그러나 차드 민족해방전선이 구쿠니 웨데이의 구쿠니파(FAP, 인민군)과 이센 아브레의 아브레파(FAN, 북부군)으로 분열돼 갈등과 대립이 심해졌고, 구쿠니 웨데이가 잠정국민연합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국방장관 이센 아브레와의 대립이 더욱 심해져 1980년 3월 FAP와 FAN의 내전이 재발했다.

1980년 12월 구쿠니파 FAP를 지원하던 리비아는 7000명의 군대를 보내 주둔시키고, 1981년 1월 구쿠니 정권과 함께 리비아와 차드의 합병을 선언했다. 그러나 리비아군이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의 비난으로 철수하자 1982년 6월 수단으로 도피해있던 아브레파 FAN이 다시 공세를 취해 수도를 점거하고 10월 이센 아브레가 정권을 장악,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3년 FAP가 다시 리비아의 지원으로 전략요충지 파야를 함락시키고 1984년 9월 프랑스와 리비아가 양군 철수 문제에 대해 합의했으나 리비아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1984년 6월 아브레파가 FAN에서 독립혁명민족운동(UNIR)로 개편해 정치공세를 펼쳤고, 구쿠니파가 2개로 분열돼 구쿠니파와 우마르파로 나뉘어졌다. 이러는 가운데 1986년 11월 정부군이 다시 미국의 지원으로 공세를 펼쳐 구쿠니파의 거점 사라와 리비아군 주둔지 파다를 점령했다.

◆데비 집권 후 반군 세력 약화… 내전 여전

1986년 12월 리비아가 지원하던 우마르파가 정부군과 프랑스군, OUA의 연합 공세로 패퇴하여 소멸됐고 1987년 3월 정부군이 피야라르지오를 탈환하고 아오즈지구까지 점령했다. 그러는 사이 1989년 4월 수단으로 망명해 있던 아브레의 군사고문 이드리스 데비가 리비아의 지원으로 인민구제운동(MPS)를 결성했고, 그해 12월 신헌법채택와 선거로 하브레가 다시 대통령으로 재집권했다.

1990년 데비 집권 이후 반군 세력은 많이 약화됐지만, 이들에 의한 공격이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한편 2021년 데비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마하마트 데비가 헌법을 위반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하면서 정부와 반군 간 대립보다 군부와 이에 대항하는 야권·시민 연대 간 대립이 부각되고 있다. 2022년 12월 기준 차드 분쟁은 군부가 주도하는 과도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세력 간의 저강도 무력충돌을 중심으로 전개 중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보코하람’의 위협 및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는 반군 세력의 활동이 토착 공동체 간 갈등과 연계되면서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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