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제 언론인

쓰레기매립장에서 생태문화공원으로 바뀐 제주도 돌문화공원을 11년 만에 다시 찾았다.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의 굿판(1932~2006)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볼일도 있어 오랜만에 제주에 갔다.

쓰레기매립지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주돌문화공원은 4개의 오름에 둘러싸인 광활한 지대에서 곶자왈(나무, 덩굴, 암석이 뒤엉킨 숲을 의미하는 제주어) 원시림으로 복원되고 있었다. 신화와 자연, 예술이 어우러진 곳에서 백 선생이 ‘신기 넘치는 아방가르드 전자 무당’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얼마 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등 백 선생 영상설치작품 전시회를 수차례 관람했으나 ‘백남준과 제주, 굿판에서 만나다’라는 기획전(6월 15일~8월 31일)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지역의 혼과 예술인의 넋이 살아 꿈틀댔다고 할까.

작품을 전시하는 제주돌문화공원 내 오백장군갤러리는 주차장에서 산림 산책로를 따라 여러 갈래로 들어갈 수 있는데, 최단 코스를 택하더라도 최소 2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걷는 동안 제주 신화에 푹 빠져들게 된다.

갤러리 앞쪽의 드넓은 조각공원 마당에는 무게 50t 안팎의 제주산 거석 조각상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전설의 통로, 상징탑, 모자상 등 다양한 조형물이 제주스런 ‘신화의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옛 모습의 돌하르방 50개가량이 사열하듯 한자리에 설치된 구역도 있다.

조각상 앞의 안내판은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상’ 신화를 상세히 설명해준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등지의 인류 문명 발상지에서 넘쳐나는 신화에 비하면 한반도에서 탄생한 설화나 신화는 극히 미미한 편이다.

남한에서 가장 많은 구전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제주다.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은 키가 너무도 큰 거구다.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왼쪽 다리가 제주시 앞바다의 관탈섬에 걸쳐있고, 오른쪽 다리는 서귀포 앞바다 지귀섬에 닿는다고 한다. 할망이 오백명의 아들 형제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 모자의 애틋한 정을 주제로 한 신화를 공원 내 조각상들이 그려내고 있다.

백남준의 전시물은 “우리의 얼은 굿이다”라는 말로 제주 신화와 걸맞는 메시지를 전한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흰 도포와 검은 갓을 걸친 백남준은 실에 주렁주렁 매단 놋쇠 요강과 주발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장죽 곰방대 2개를 입에 문 채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의 절친인 독일인 전위예술가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1990년 7월 20일 진혼굿을 펼친 장면을 중심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접신, 일상과 신성의 만남을 테마로 한 사진, 영상, 설치물을 전시하고 있다. 백남준의 생전 어록도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예술은 쉽게 말하면 잔치예요. 굿은 나에게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입니다. 나는 굿쟁이에요.” “원래 예술가는 사기꾼이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필자 기억 속에 있던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의 진의를 이번 전시회를 통해 제대로 알았다.

제주돌문화공원은 서울 난지도의 월드컵공원과 비슷한 326만 9000㎡(약 100만평) 규모다. 1990년대 제주도 생활쓰레기를 매립해오다 민관협력으로 생태문화공원을 꾸몄다고 한다. 2006년 1단계에 이어 2020년 2단계까지 민간 기획전시물 기증, 공공 사업비 투자 방식으로 20년 넘게 공원 조성 대역사를 진행했다. 필자가 2012년 돌문화공원을 찾았을 때 다소 황량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자연은 최대로, 인공은 최소로’라는 환경 우선 정신으로 공원을 다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울 난지도매립지, 인천 수도권매립지, 울산 태화강 삼산•여천매립지 등지의 쓰레기 산이 생태숲과 시민공원으로 재생되고 있다. 제주돌문화공원처럼 민관이 힘을 합쳐 지역의 역사와 생태 가치를 되살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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