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 숙종 때 최고의 권력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맞짱 뜬 학자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다. 우암이 오죽 미웠으면 미수를 가리켜 ‘독충(毒蟲)’이라고 까지 폄하했겠나. 그런데 미수는 한 번도 지지 않고 권력을 비판했다.

미수는 독특한 글씨를 많이 남겼는데 고전체(古篆體)를 약간 흔들려 쓴 것이었다. 혹자는 미수의 글씨를 지칭해 ‘고문기자(古文奇字)’라고 평한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혹 이런 유의 글씨가 중국에서도 유행하지 않았나 서법사전과 명인 수적을 열심히 찾아봤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고전체’를 즐겨 쓴 중국의 명인도 많았으나 미수처럼 독특한 필체를 완성한 이가 없었다.

최근에는 간혹 미수의 글씨라고 서첩을 가져와 문의하는 이들도 있으나 일부는 진적으로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글씨가 유명하고 보물까지 지정된 예가 있으니 가짜가 유통되고 있는 모양이다.

미수도 끈질긴 노력파였다. 과거 급제자가 아니면서도 나중에는 재상의 지위까지 영전했다. 젊은 시절부터 고문서체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진나라 이후에 어지러이 흩어져 버린 점을 탄식해 서체 연마에 정진했다고 한다. ‘고문운율’이란 저서는 70세 되던 해 펴낸 것으로 평생 연구하는 습관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미수는 목민관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강원도 삼척시에서는 매년 봄에 춘향대제가 열리는데 바로 미수 목민 정신을 기리는 행사다.

미수와 삼척은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삼척부사로 2년 남짓 재직하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유명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이 시기 만들어진 것이다. 미수는 목민관으로 자연재해에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했으며 저수지와 수로 등 수리시설의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관내 저수지를 조사하고 수로도 정비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미수를 존경하고 따랐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옛 수령들은 하늘에 의존하는 농민들이 가뭄에 큰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물을 가두고 예비하는 것을 시정의 제일 목표로 삼았다.

제천 의림지는 신라 때 축조한 제방이다. 김제 평야를 위해 만들어진 벽골제는 백제 때 만든 것이다. 백제는 고대 오사카 지역의 제방 축조기술도 가르쳐 줬다. 이미 천 수백년 전부터 물을 가두는 수리시설의 중요성을 터득했던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봄까지 호남지방의 지독한 가뭄은 4대강 보가 왜 필요한가를 절감시켜 준 계기가 됐다. 천금 같은 단비가 내려 목을 축였지만 아직도 농민들과 지역주민의 걱정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주 청계천을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4대강 보에 대해 정치 논리가 적용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산은 목민심서(公田)에서 산림이나 천택(川澤)의 합리적인 운영 방법을 제시했다. 공전은 산림(山林)·천택(川澤)·선해(繕廨)·수성(修城)·도로(道路)·장작(匠作) 등 모두 6조로 구성됐다. 이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해 목민관의 실천 시책을 소상하게 밝힌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정신 차리지 못하는 탐관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굶어 죽은 시체가 구덩이를 메우지만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하략).’

아. 미수 허목처럼 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은 목을 내놓는 일이 있어도 굴복하지 않는 것이 선비이자 사대부의식이다. 이런 정신이 있어야 국민들을 위해 어떤 일이 가장 시급한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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