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일제 강점기이던 1927년 경성방송국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도 방송의 시대가 열렸다. 초기 경성방송국은 일본어 7, 한국어 3의 비율로 방송했다. 그때에도 스포츠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아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기도 했다. 스포츠 중계가 있을 때면 라디오 앞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경성방송국은 개국 첫해인 1927년 8월 28일 경일야구쟁패전을 중계방송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 중계방송이다. 

초기 경성방송국의 스포츠 중계는 일본어로만 하다가 후에 한국어와 일본어로 이원 방송하였다. 한국어로 된 최초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1933년 4월 14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일본 전수대학팀과 조선선발팀 간의 권투경기였다. 이때 마이크를 잡은 박충권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스포츠 캐스터다. YMCA를 통해 소개되고 보급된 야구는 당시에도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고 방송에서도 야구만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별도 편성하였다. 1930년 4월부터 10월까지 모두 70회의 야구 중계방송이 이뤄질 정도로 야구의 인기가 대단했다.

해방 이후에도 스포츠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때는 전쟁 중이었음에도 대표 팀을 내보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스포츠 행사에 참가한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선전하는 소식을 전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부심을 줄 수 있겠다는 판단에 따라 출전을 결심한 것이다.

당시 전쟁으로 시름에 차 있던 국민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올림픽 출전비용을 마련하였고 44명으로 대표 팀을 꾸렸다. 성금 모집에는 해외동포는 물론 주한 미군들까지 가세했다. 역도의 김성집 선수와 권투의 강준호 선수가 동메달을 따내 먼 이국땅에 태극기를 걸어 올렸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자 국민들은 잠시나마 고단한 삶을 잊을 수 있었다. 당시 KBS의 서명석 아나운서가 혼자서 엔지니어 역할까지 해 가며 중계방송을 하였다.

1960년대 들면서 실업팀이 창단되는 등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더욱 높아졌고 스포츠 중계방송의 횟수도 늘어났다. 1968년 10월 12일에는 KBS TV와 MBC TV가 일본 NHK와 제휴하여 멕시코 올림픽을 위성 중계방송했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중계방송이다. 1970년에는 MBC TV가 우리 방송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축구 중계방송을 했다. 이후 민영방송이 등장하면서 스포츠 중계방송 경쟁이 치열해졌고 1980년대 들어 프로 스포츠가 생겨나고 스포츠 붐이 조성되자 스포츠는 방송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콘텐츠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요즘은 첨단 기술을 앞세운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해 TV 중계방송이 더욱 발전하고 있다. 경기장에 가지 않고서도 TV로 시청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때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TV 중계방송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방송 선진국이다. 다른 나라에서 제작한 국제신호를 받아 중계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수준 높은 국제신호를 제작, 세계 각국으로 송출하고 있다. 첨단 IT 기술과 잘 훈련된 기술진, 전문가들로 구성된 중계요원 등 물적 인적 자원 모든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광주에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한창이다. 우리나라가 제작한 국제신호를 통해 전 세계로 대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방송 미디어 수준을 자랑하는 멋진 무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