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일본에 사신을 보내라는 도요토미의 성화에 못 이겨 조선은 드디어 1590년 3월 일본에 사신단을 파견한다. 정사는 서인 황윤길, 부사는 동인 김성일, 서장관은 허성이었다. (허성은 홍길동전의 저자이며 혁명을 모의하고 있는 것이 발각돼 광해군 때 처형당한 허균의 형이고 동시에 빼어난 여류문장가인 허난설헌의 오빠다).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를 만나는 등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만 1년만인 이듬해 3월 귀국한다. 임란 1년 전이다. 그런데 그들의 귀국 보고가 정반대여서 혼란을 부른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수많은 군선(軍船)을 가지고 있어 반드시 침략해올 것’이라 했다. 이에 부사 김성일은 ‘침략 조짐이 전혀 없으며 더구나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결코 못 된다’고 맞섰다. 당시의 적대 파당인 동인과 서인은 사사건건 이렇게 버릇처럼 싸웠다. 국가 안위와 존망에 관한 문제를 갖고도 그리했을 만큼 그들은 너무나 한심하고 무책임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열띠게 논쟁하고 싸운 것이 아니라 적대 파당에 권력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싸웠다. 따라서 거짓을 주장하는 쪽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거짓을 참이라고 우기며 덤벼들었을 것이 빤하다. 그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패거리 파당 싸움의 특징적 행태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렇게 중대한 문제에 관해 의견이 심각하게 엇갈려 있음에도 임금을 중심으로 한 조정 차원에서 재조사나 재규명을 해보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괜히 전쟁 얘기를 퍼뜨려 백성을 혼란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구실로 동인인 부사 김성일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는 거짓 보고를 최종 국론으로 채택하고 말았다. 속으로는 개운치가 않았을 것이지만 김성일의 말에 따라 ‘그러면 그렇지 도요토미가 설마 쳐들어야 오겠어’라는 요행(僥倖)과 사행(射倖)을 바라는 쪽으로 조정 공론을 몰아갔다. 이는 당시의 조정 권력이 동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던 역학 관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한편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지만 황윤길의 ‘침략설’에 동의했고 김성일을 수행한 황진 역시 동인이었으면서도 마찬가지로 그리했다. 물론 이들의 견해는 묵살 당했다. 이들의 의견까지를 포함하면 ‘침략설’이 사신단에서 다수를 이루고 있음에도 결정은 딴 방향으로 흘렀다. 외교 사절 영접 임무를 맡고 있던 선위사 오억령은 ‘일본은 내년에 조선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조정은 도리어 각 도에 명을 내려 진행 중이던 축성(築城)을 비롯한 전쟁 대비 활동을 중단시켰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임금을 포함한 당시의 조정 요인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극심한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에 빠져 있었던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진실로 백성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전쟁 분위기가 잠시라도 자신들이 누리는 영화와 그들의 군림하는 삶의 열락(悅樂)을 빼앗아갈까 두려워 김성일의 거짓 증언을 안일하게 국론으로 삼았던 것으로 봐진다.

이렇게 조정 공론이 망국의 길로 기울고 있는 데도 목숨을 건 간언이나 상소를 올린 신하는 없었다. 이는 모든 조정 대신들이 국가 안위와 관련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입을 닫고 모럴 해저드에 침잠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율곡이 10만 양병(養兵)설을 건의했다는 말은 있으나 그 근거는 유감스럽게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조정 지도자들은 백성을 바라보고 백성을 걱정하는 정치는 뒷전이며 임금의 총애를 잃지 않는 일, 바로 그것이 최우선 관심사였고 반대로 총애를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음이 명백하다.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면 이순신이다. 장군은 왜란을 예견하고 전라좌수사의 입장에서 조용히 거북선을 발명해 건조하고 군사의 훈련에 힘쓰는 등 왜란에 실질적인 행동으로 대비했다. 이러는 동안 도요토미는 조선에 첩자들을 몰래 보내는 등 조선의 움직임을 면밀히 파악해 나갔으며 왜관의 왜인들은 본국으로 불러들여 장차 있을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게 했다. 왜인들이 조선에서 다 사라진 뒤에서야 조선 조정은 도요토미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 정벌을 외치며 10년을 전쟁 준비에 몰두하는 동안 조선 조정은 이처럼 정권을 잡은 사림(士林)세력들의 권력 투쟁으로 세월을 허송했다. 1589년에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서인 정철이 동인 세력을 치죄(治罪)함으로써 서인이 잠시 득세하기도 했다. 그것이 이른바 기축옥사다. 좀 더 빨리 파송할 수 있었던 왜국에 대한 사신단도 정여립 모반 사건의 치죄가 길어짐으로써 시기가 너무 늦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정권을 잡은 서인의 득세는 오래지 않아 금방 뒤집혔다. 임란 직전인 1591년 정철이 광해군을 택한 세자 책봉을 선조에 건의했다가 분노를 사 실각했다. 선조는 그를 귀양 보냈다. 동인 강경파들이 그를 사사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좌의정 정철이 세자책봉을 건의해 실각한 것은 동인들의 음모의 덫에 걸려든 탓도 있지만 세자감으로 광해군이 아니라 은근히 총비인 후궁 인빈 김씨가 낳은 신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던 선조의 역린(逆鱗)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정철과 함께 이 문제를 임금에게 건의하기로 굳게 약속한 동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이산해는 정작은 뒤로 인빈 김씨 측과 은밀히 접촉해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어 그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선조에게 말하게 했다. 그 말을 듣고 선조는 격분했다. 급기야 정철이 경연장에서 세작 책봉을 건의하자 동인인 이산해와 류성룡은 힘을 합해 거들기로 해놓고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철에 분노를 폭발시키고 그를 파직했다. 이처럼 누란의 위기에서도 조선 조정은 국가 안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래서 조선 울타리 밖에서 집안 습격을 노리던 전쟁이 불가피했던 늑대 도요토미에게 정말 조선 침략의 찬스를 허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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