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이미 재난이 돼 버린 메르스다. 말 그대로 ‘죽음의 바이러스’다. 분노조절이 쉽지 않다. 정부 당국의 호언장담과 달리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감염자가 전국으로 확산돼 장기화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병원 주변 자영업자들을 도산 위기로 몰고 가는 등 가뜩이나 위축된 경제에 큰 타격을 안겨주고 있다.

“사스 환자가 아직 국내에서 발생하지 않았지만 철저히 대비하겠다.”(고 노무현 대통령)

지금부터 12년 전인 2003년. 사스가 세계를 휩쓸었다. 가까운 중국이 큰 피해(감염 5328명, 사망 349명)를 입었다.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교류가 활발한데도 피해(감염 4명, 사망 0명)를 최소화했다. 미국(감염 251명, 사망 0명)도 비교적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홍콩(감염 1755명, 사망 299명)과 캐나다(감염 251명, 사망 44명)는 중국과 함께 사스 방어에 실패한 국가의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노무현 정부가 환자 발생 전부터 예방을 위해 진력한 데 따른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감염자가 공항을 벗어나 국내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건 전 국무총리)

환자 발생 96시간 전에 ‘사스방역대책본부’가 출범했다. 관련부처가 총동원돼 무조건 사스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는 데 1차 목표를 두었다. 여행 자제 지역을 언론을 통해 알리고 위험지역 여행을 전면 금지했다. 열감지기 10대를 구입해 인천공항, 김해공항, 제주공항, 베이징공항에 설치했다. 국내에 착륙한 비행기에서는 사람들을 못 내리게 막고 역학조사요원들이 기내로 직접 들어가 체온측정을 했다. 전국 41개 의료기관을 사스 격리병원으로 지정하고 격리 병상을 미리 확보했다. 환자가 발생하자 10일간 강제 격리 조치했다. 국립보건연구원, 일선 검역요원들, 군 인력 등으로 구성된 사스 상황실에서 24시간 사스 대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사망자가 1명도 나오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인권의 기본은 사람의 건강이고, 개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같은 조직인 질병관리본부가 2004년 정식 출범했다. 노무현 정부 때의 성공적인 사스 방어를 돌이켜보더라도 이번 메르스 방역은 예방과 초동 방어에 실패한 뒷북행정이었다. 지난달 4일 중동 지역에서 국내로 들어온 메르스 첫 번째 환자는 확진판정을 받을 때까지 세 곳의 병원을 전전하며 메르스 바이러스를 확산시켰다. 당국은 삼성서울병원을 찾은 환자가 30일 확진판정을 받은 뒤에도 무려 8일 동안 우물쭈물하며 병원폐쇄명령 등 비상대응 조치를 하지 않았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메르스와 에볼라 방어와도 비교된다. 지난해 5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입국한 미국인이 사흘 뒤 고열과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보이자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수차례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기민한 종합대응책을 마련했다. 환자를 즉각 격리조치함은 물론, 백악관의 지휘에 따라 CDC와 병원이 협력해 감염자 주변 인물과 버스·비행기에서 접촉한 사람을 전원 추적해 개별 동선을 일별로 홈페이지를 통해 공표했다. 그 결과 메르스 상황은 19일 만에 종식됐다. 4개월 뒤 다시 에볼라가 발생했다, 병원 명단, 환자 이름과 거주지를 모두 공개하는 등 비상조치가 단행됐다. 오바마는 외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에볼라 대응에 범국가적 행정력을 집중하도록 하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한국은 세월호에 이어 또다시 골든타임을 놓쳤다. 메르스 첫 감염자 발생 7일 만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첫 대면보고가 이뤄졌고, 14일 만에야 처음으로 긴급회의가 열렸다. 미적지근하고 안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병원도, 환자도, 주거지도, 보호자·방문객 명단도 공개하지 않고 ‘쉬쉬’ 하는 사이에 메르스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번지고 말았다. 당국은 ‘다음 주’부터는 고비를 넘겨 수그러들 것이라고, 혹은 지병이 없는 젊은 사람은 공포에 떨 필요가 없으며, 직접 접촉자 외엔 감염되지 않으며 치사율도 턱없이 낮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 ‘다음 주’는 다음 주가 되자 또다시 ‘다음 주’가 돼 버렸다. 지병도 없었던 사람이 사망했고, 30대의 젊은 의사가 위중한 상황이다. 4차 감염자도 나왔다. 사망자 소식은 계속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대통령이 사과 담화는커녕 ‘조기 종식’이라거나 ‘예기치 않은 메르스 사태’라는 비현실적인 대국민 메시지를 내도록 한 당국자는 누구인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무능하면서도 유능한 체한 것인가.

익스트림 리더십이란 말이 있다. 빼어난 판단력과 통솔력으로 위기상황을 이끄는 지혜로운 리더십이 그립다. 상황 판단을 명민하게 해 주거나, 혹은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진 정부이건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정부를 우리는 간절히 원한다. 메르스가 중동서 발병했을 때부터 미리 범국가적인 비상대책을 만들어 놓았어야 했다. 그리고 공항이 뚫려 환자가 단 1명이라도 발생하면 봉쇄·격리·추적·발표 등 초기 대응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졌어야 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미리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을 조련해 이 강토를 지켰던 이순신 장군처럼. 지금 이 땅에 ‘이순신’이 있는가. 말로만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으로만 징비록(懲毖錄)을 외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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