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이 말의 원조는 정확히 모른다. 우리에게는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 명언으로 전해질 뿐이다. 피부에 와 닿는 말이다. 자연과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물은 흐르지 않으면 썩고, 정치는 여론과 국민감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망한다. 여야 정치인들 모두 이 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정치인들을 제 손으로 뽑아 국회로, 청와대로 보낸 국민 입장에서는 그들이 왠지 둔감하게 느껴진다. 정치가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잘 알고는 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안겨 준다. 초동대응이 미흡해 망측한 재난이 돼 버린 메르스 문제도 그렇다. 조기에 못 막아낸 ‘뒷북 위정(爲政)’을 바라보는 시선이 악화일로다. ‘세월호 때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경기가 더욱 좋지 않다’고들 한다. 발병 한 달 만이다. 문 닫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하는 등 내수 경제가 거의 폐허가 돼 버렸다. 휘어질 대로 휘어진 서민 허리가 이젠 부러질 듯 휘청거린다. 여기에 가뭄까지 겹쳤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정부와 정치권은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국민 정서와는 괴리가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위정자(爲政者)들을 바라보고 있는 국민들 눈에는 구조적인 문제를 손도 못 대는 것 같고 도대체 발상의 전환도 없이 뜨뜻미지근하기만 할 뿐이니.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급등락을 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메르스로 인해 다시 낮은 포복중이다. 지난 22일 리얼미터 조사 결과 박 대통령 지지율은 34.9%를 기록했다. ‘국정수행을 잘못하고 있다’는 부정평가가 60.5%였다. 메르스 사태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신뢰도가 뚝 떨어진 것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양강 체제로 흘러가던 차기 대선 경쟁에도 지각변동이 생겼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22.5%를 기록해 20.1%를 얻은 김 대표와 선두권을 형성했다. 수위를 달려온 문 대표는 지속적인 하락세 속에 15.6%로 다소 처진 3위를 마크했다.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정계개편이 불가피한가. 무소속 천정배 의원의 ‘호남 신당설’이 꿈틀거린다. 내년 총선을 1차 목표로 한 듯하지만 10월 재보선을 겨냥한 9월 창당설도 불거지고 있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원론적으로는 또다시 호남 지역 정서를 등에 업은 독자세력화라는 점에서 전체 국민 시선이 곱지 않다. 전국정당을 포기한 것이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제대로 야당다운 모습을 못 보여주고 있다는 반성과 친노그룹에 대한 차가운 호남정서가 바탕이 돼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 지각변동과 합종연횡이 현실적으로는 필연적인 셈이다.

박 대통령은 겨우 임기의 반을 채웠다. 하지만 벌써부터 레임덕이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는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낯 뜨거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메르스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이나 반걸음 늦은 박 대통령의 메르스 대응 행보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문제가 여의도를 강타하면서 새누리당 내 친박과 비박 사이에 머지않아 파열음이 번져 나올 분위기다. 경제 부처 개각이 이뤄지면 원조친박으로 분류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국정감사 이전에 여의도로 복귀하는 것을 신호로 친박 세력이 똘똘 뭉쳐 여권 지도부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연합전선을 펼쳐온 ‘김무성-유승민 투톱’ 간에도 내전 조짐이 있다. 의견이 다르다면 다퉈도 좋다. 그러나 국민은 근본적인 개혁을 원하고 있음을 알기나 하는지. 정치가 국민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당리당략과 이기주의에 의한 것이라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개헌 문제만 꺼내면 미친 짓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개헌논의가 안보나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거나 국론분열을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와 우려는 정치공학 집단에서 과장해 생산한 것이었다. 미친 짓인데도 대다수가 결혼을 한다. 그러하듯 권력구조를 현실에 맞게 갖추는 것이라면 개헌도 필수적이 아닐까.

대통령 조기 레임덕이 운위되는 데는 5년단임제 헌법의 영향이 크다. 미래권력이 아닌 과거권력, 즉 곧 물러날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많이 높아진 민도(民度)와 시대상황을 반영해야 한다. 국민 여론이 신속하고도 유연하게 정치시스템에 반영돼야 한다. 재선을 통해 집권 정부 정책이 계속 추진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현 집권세력이 그만두고 내려와 다른 정치세력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는 게 좋은지 국민이 수시로 판단하게 해야 한다. 정치는 감동이다. ‘촉’과 ‘안테나’를 잃으면 더 이상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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