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 온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 그대로다.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오히려 병을 얻고 저승사자까지 만나야 하는가. 치료는커녕 확진이 늦어 자신이 메르스 환자라는 것도 모르고 숨을 거두는 상황에서 당국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겠는가. 병원 응급실에서는 왜 처음부터 호흡기질환이나 고열 환자를 선별하고 별도 장소에서 진료하지 않았는가. 초기 의심 환자들은 생활비를 보전해 주더라도 처음부터 전원 격리 조치해 무차별 확산을 막았어야 하지 않는가. 확진까지 시간이 왜 그리 오래 걸리며, 처음부터 전국 지자체나 가까운 보건기관별로 나눠 신속히 메르스 감염여부를 진단해야 하지 않았는가. 왜 보건당국은 메르스 확진 환자나 감염 병원을 즉각 실시간으로 발표하지 않고 새벽까지 기다려 한꺼번에 발표하는가. 초동 대처 실패, 골든타임 실기(失機)로 세월호 침몰사고 때 오류를 반복하는가. 당국의 무능·혼선이 다 드러났는데 왜 박근혜 대통령이 특별대책반 회의를 주재하고 방역 컨트롤타워를 직접 지휘하지 않는가. 대통령 방미(訪美)보다도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 메르스 긴급 방역이 선후관계에서 후순위여야 하는가.

첫 단추가 잘 꿰어지지 못했다. 보건복지부 등 보건당국부터 안이했다. 위기대응능력과 전문성도 없고 어처구니없는 말 바꾸기로 일관해 국민의 분노를 산 관련부처 수장부터 문책해야 한다(애초 임명부터 문제였지만). 당국은 처음부터 상황 판단을 잘못해 어이없는 비밀주의를 고수했다. ‘D병원’이 무어니 하며 알파벳놀이와 깜깜이 행정을 계속했다. 백보를 양보해 아산이나 평택의 경우, 대응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고 해도 대형병원이 아니어서 그랬다손 치자. 메르스 서울 진입과 2차 유행의 진원지가 된 삼성서울병원이 실망스럽게도 감염에 속수무책이었다. 14번 메르스 환자가 지난달 27일 평택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왔다가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일반 폐렴 환자로만 취급했다. 그보다 일주일 전인 20일 첫 번째 메르스 환자가 확진 판정을 받았던 바로 그 병원, 그 응급실이었다. 이때부터 의심환자들을 격리시켜 선별 진료하는 게 옳았다. 병원은 첫 환자가 나온 20일 지역사회에의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만천하에 공표하고 긴급조치를 했어야 했다. 속히 음압병실이나 음압병상도 갖춰야 했고. 여건이 안 되면 천막을 치건 컨테이너를 활용하건 간에 호흡기 질환이나 고열 환자는 무조건 격리해 문진·예진은 물론, 메르스에 유의해 따로 진료해야 했다. 29일 정부 통보를 받고서야 메르스인 줄 알았으며 사흘간 격리도 하지 않았다. 35번 환자인 삼성서울병원 의사도 27일 회진을 돌던 도중에 메르스에 관한 사실을 인지했고, 그 후 사람들을 접촉하다가 격리됐다. 의사 개인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병원 측 대응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 병원, 민간인 할 것 없이 법정부적 범국가적 대처가 필요한 상황에서 청와대와 보건당국은 지난 4일 긴급기자회견에 나선 박원순 서울시장에 불만을 터뜨리기만 했다. 박 시장의 조치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정치적 제스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긴급피난’의 성격이 강했다. 만일 대형병원 감독기관인 서울시마저 우물쭈물하거나 묵인해줬다면 어찌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두렵지 않은가.

과거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크게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자 향후 처신과 관련, 한 역학인에게 자문했다. 역학인의 조언은 이 창업주 운세가 다소 약하니 병원이라도 하나 지어 이웃에 베풀고 섬기는 마음을 실천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삼성의료원이었다고 하는 얘기가 항간에 있다. 창업주가 굳이 병원을 설립한 심모원려를 감안했어야 했다. 단기적으로는 손해라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만을 생각해 병원이 선제적으로 메르스 첫 환자 발생 사실을 공개하고 응급실 임시 폐쇄, 음압병실 설치 등 대범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국민은 ‘메르스 극복’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불안하다. 초동 대처 실패가 전국적인 메르스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멍이 뻥뻥 뚫리고 있다. 명단에 없던 병원에서 메르스 확진 환자가 나오고 자가격리된 의심환자들은 생업 때문에 지역사회 주민들과 접촉을 피할 수 없어 향후 더욱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지나 않을런지. 외국 언론도 한국의 메르스 대처를 비난하고 있다. 국가신인도 추락과 대한(對韓) 투자 위축, 한국 폄훼 눈초리의 확산이 염려스럽다. 세계적 기업 삼성의 총수 이건희 회장이 현재 입원해 있고 국내 최고 수준 의료진과 시설을 갖춘 삼성서울병원이 뚫렸다. 서울아산병원도 더 이상 안전한 병원이 아니다. 이러고도 OECD 가입국이자 선진국에 진입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 할 것인가.

범죄와 질병은 소급 불가역성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한 번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하면 회복 불가능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나 사후약방문보다는 사전 예방이 최고다. 전쟁 상황이라 여기며 정신 바짝 차리고 정부, 지자체, 의료기관, 국민이 다 힘을 합쳐 지혜롭게 범국가적인 대처를 해나가야 한다. 필요한 것은 전시행정(展示行政)이 아닌 전시행정(戰時行政)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메르스를 못 잡으면 방미를 차후로 연기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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