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그해 가을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진(晋)나라에 쳐들어가서 하곡에서 싸웠다. 이유는 진(晋)나라 왕의 애첩인 이희의 음모에 의해 목공의 의제인 진(晋)의 태자 신생이 신성에서 자살했고 또한 공자 중이와 이오 두 사람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목공 9년에 제의 환공은 규구에서 맹세를 열었다. 진(晋)나라에서는 헌공이 죽고 이희의 아들 해제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대부 이극의 손에 죽었다. 헌공으로부터 뒷일을 부탁받은 재상 순식이 부득이 해제의 아우인 탁자를 왕으로 계승시켰다. 그러나 이극은 다시 탁자마저 죽였고 그의 아우 순식마저 죽여 버렸다.

먼저 진(晋)나라에서 탈출했던 공자 이오의 사자가 진(秦)나라에 찾아가서 이오가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게 됐다. 목공은 그 청을 받아들여 백리해에게 명하여 군사와 함께 이오가 무사히 돌아가게 하였다. 그때 이오는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제가 진(晋)나라의 왕이 되는 날에는 하서의 여덟 성을 귀국에 바치겠습니다.”

머지않아 이오는 진(晋)나라의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비정을 사자로 삼아 진(秦)나라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영지를 떼어 주겠다는 약속은 전혀 무시했고 이희 일파를 제거했던 공로자인 이극을 죽여 버렸다. 본국에서 이극이 죽었다는 소식이 아직 진(秦)나라에 사자로 머물고 있던 비정의 귀에도 들려왔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도 어찌 될지 모른다고 겁을 먹은 비정은 목공에게 말했다.

“이오가 왕에 올랐으나 여론은 매우 나쁩니다. 본국에서 인망이 있는 것은 오히려 중이입니다. 군주께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어긴 것과 이극을 죽인 것도 모두가 여생과 극예가 꾸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이오를 받들고 있습니다. 청컨대 감언이설로 두 사람을 불러다가 이곳에 붙잡아 두고 그동안에 중이를 진(晋)나라 왕으로 세운다면 만사는 잘될 것입니다.”

목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국하는 비정에게 사자를 딸려 보내 여생과 극예를 불러들였다. 조심성이 많은 두 사람은 비정이 무언가 일을 꾸몄다고 의심하고 왕 이오에게 허물을 고자질하여 비정을 죽여 버렸다. 비정의 아들 비표는 진(秦)으로 도망가서 목공에게 호소를 했다. “진(晋)나라 왕은 무법자이며 백성들에게 신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무찌르셔야 합니다.” 그러나 목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는 군주라면 어째서 중신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군주가 곧 신임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장래에 대비해서 비표를 몰래 신하로 삼았다.

목공 12년에 제나라의 관중과 습붕이 죽었다. 그해 진(晋)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못하여 진(秦)나라 목공에게 양식을 요구해왔다. 그러자 비표가 나서서 목공에게 말했다. “양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 쳐부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공은 공손지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흉년과 풍년은 어느 나라든 번갈아 찾아오는 일이니 곡식을 주는 게 좋겠습니다.” 목공은 다시 백리해에게 물어보았다. “이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을 경청한 목공은 식량을 도와주기로 했다. 진(秦)나라 도읍인 옹으로부터 지(晋)나라 도읍인 강에 이르기까지 강에는 배들이, 육지에는 수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나갔다.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목공 14년에 진(秦)나라에서 흉년이 들어 진(晋)나라에 식량을 요청했다. 혜공인 이오가 신하들과 상의를 하자 괵야가 나섰다.

“지금이야말로 진(秦)나라를 쳐부술 때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혜공은 그의 의견에 따라 이듬해인 목공 15년에 군사를 일으켜 진(秦)나라로 쳐들어갔다. 목공은 이에 맞서 비표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목공 자신도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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