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관중과 포숙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관중이 포숙을 자주 속였으나 가난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포숙이었다. 죽음에 처한 관중을 제나라에 추천한 것도 포숙이었다. 결국 관중은 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다. 뒷날 관중이 말했다.

“나는 옛날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다. 서로 이익을 나눌 때에는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했지만 그는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를 위해서 일을 도와주려고 했던 노릇이 오히려 그를 궁지에 빠뜨리는 결과를 빚었으나 그는 나를 어리석은 자라고 욕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만사가 잘 되는 경우와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나는 세 번이나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때를 잘 만나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싸움터에 나갔을 때 도망쳐 왔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내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자 규가 후계자 계승 때문에 다투다가 패했을 때 동지였던 소홀은 그를 따라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목숨을 부지하며 결박당하는 수치를 받았으나 그는 나를 두고 파렴치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눈앞의 명예에만 매달려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수치라고 여겼던 것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신 것은 어버이나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아였다.”

포숙은 관중을 환공에게 추천한 뒤에 자기는 관중보다도 아랫자리에 서 환공을 받들었다. 그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에 봉사했고 명문의 대부로서 10여대에 걸쳐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이 현명했던 것을 칭찬하기보다 포숙이 사람을 잘 알아보았던 능력을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본래부터 제나라는 바다에 접한 약소국가였으나 관중이 재상 일을 맡아보면서 경제 진흥과 부국강병책에 힘썼고 민중들의 뜻을 좇아 정책을 베풀었다. 그것에 대해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에게 예절을 부르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도덕의식은 스스로 높아지게 마련이다. 군주가 재정상의 무리를 하지 않는 것이 곧 민생 안전의 근본이다. 그다음에야 예, 의, 염, 치의 네 가지의 기본이 되는 바탕을 굳게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끊임없이 백성들의 뜻에 따라 적절히 조치한다는 것이 바로 관중의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정책을 논할 경우 실행할 수 있는 것이냐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시키도록 했다. 실정을 저지르더라도 거기서 하나의 교훈을 배워 성공으로 이끌고 또한 언제나 균형을 유지시키도록 배려해서 시행착오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 관중이 베푼 정치의 특성이었다. 이를테면 환공은 부인인 채희의 일로 화를 내고 괴로움을 풀어보고자 채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관중은 뒤이어서 포모가 조공을 게을리한다는 구실을 삼아 초나라를 공격했다. 또한 환공은 북쪽의 야만족인 산융을 정벌했다. 그러자 관중은 그 기회에 연나라 왕에게 명해서 소공의 집권을 부활시켰다. 그런 다음 가 땅의 맹세에서 환공이 장군 조말에게 약속한 것을 뒤집으려고 하자 관중은 환공에게 간언해서 믿음을 지키도록 건의했다. 이와 같이 관중은 항상 대의명분을 생각했기 때문에 제후들은 제나라를 맹주로 받들게 된 것이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얻으려고 한다면 우선 주어라. 그것이 정치의 진리이다.”

관중의 재산은 제나라 공자와도 견줄 만했고 분수에 넘치는 사치도 했으나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관중이 죽은 뒤에도 제나라는 그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갔으며 그의 정책을 지킴으로써 항상 타국의 제후들보다도 앞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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