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지난 주말, 동네 영화관에서 아내와 함께 공전의 히트를 기록 중인 영화 ‘국제시장’을 보았다. 이 영화는 오래된 기억과 우리의 현대사를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한국동란의 비극이 낳은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은 질풍노도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대표해주었다는 느낌이었다. 영화 속에서 역사 속의 유명 인물을 설정시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은 1990년대 초반 큰 흥행을 이루었던 ‘포레스트 검프’에서 벤치마킹해 웃음과 유머를 제공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디자이너 앙드레 김, 가수 남진, 씨름 선수 이만기 등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과 조우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필자가 눈여겨 본 장면은 이만기의 등장이었다. 1970년대 중반 마산 무학초등학교 씨름부 시절 주인공과 식당에서 마주치는 모습과 1980년대 초반 천하장사 씨름 타이틀을 거머쥐는 장면을 TV를 통해 중계되는 장면이었다. 덩치 큰 선배들과 함께 식당에서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며 주인공을 질리게 한 ‘꼬마’ 씨름꾼의 추리닝 등판에 ‘마산 무학초등학교 이만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민속씨름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만기의 천하장사 결정전 장면을 독일 광부경험을 통해 장만한 자신의 집 거실 TV 중계를 통해 본 주인공은 ‘이만기 만세’를 외쳤다.

영화 속에서 이만기를 등장시킨 것은 아마도 그가 스포츠 스타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기가 새삼 주목받는 것은 한 시대의 인물로서 스포츠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우며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게 이유였다. 이만기는 해방 이후 한국스포츠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이며 1980년대 민속씨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천하장사였다.

영화 속의 이만기를 보면서 20여년 전 젊었을 때 그와 관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1997년 IMF의 한파로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큰 아픔을 겪고 있을 때, 하와이에서 민속씨름을 홍보하는 천하장사 대회가 열렸다. 필자는 씨름담당 기자로, 이만기는 TV 해설자로 현장에서 서로 만났다. 이만기는 선수생활을 은퇴하고 인제대 씨름감독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만기는 필자에게 깍듯하게 ‘기자님’으로 부르며 예의를 갖추면서도 소주잔을 주고받을 때는 살가운 정을 느끼게 했다. 인기 스타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호방하면서도 수더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만기는 당시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씨름단이 속속 해체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방송에서 씨름을 존속시켜 달라고 호소하며 필자를 비롯한 씨름 담당 기자들에게도 씨름의 활성화에 대해 좋은 기사를 써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민속씨름은 기대대로 되지 않았고, 200년대 초반 그는 한국씨름연맹으로부터 영구 제명이라는 황당한 중징계를 받았다. 민속씨름을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했던 연맹에 대해 쓴소리와 충고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승리에 집착해 다양한 기술보다는 힘에 의한 씨름에 치중한 결과, 대중들의 외면을 받아, 프로씨름 선수들이 격투기로 전환하면서 프로씨름은 끝내 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고유의 씨름은 격동의 현대사만큼 파란만장한 역사의 과정을 섭렵했던 것이다.

씨름 선수, 방송 해설자, 대학교수(인제대 사회체육학과 교수), 방송인 등으로 성공한 이만기는 ‘국제시장’에서 역사 속의 인물로 등장했지만 아직도 필자에게는 기자시절의 청춘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는 국내 스포츠도 이만기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다. 축구, 야구에 이어 농구, 배구가 프로스포츠로 자리 잡았고, 골프 등에서도 세계적인 선수들이 많이 탄생하며 국내뿐 아니라 국제 경쟁력을 갖추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바쁜 사회생활을 하는 이만기의 정열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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