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유왕이 견융에게 죽자 주나라는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 주(周)나라는 이미 천자로서의 지배력을 잃었고 사실상 하나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제후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게 되었다. 드디어 영웅들이 다투어 나서서 힘겨루기의 시대가 펼쳐졌다.

최초의 패자로 등장한 것은 제나라의 환공이었다.

제나라의 시조는 태공망이었다. 제나라 땅은 바다를 끼고 있는 산물이 풍부한 나라였다. 작위가 후작인 환공이 왕으로 재위한 것은 기원전 685~642년으로 무려 40여 년의 긴 세월이었다. 이러한 장기 집권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환공 전의 왕은 양공이었다. 양공은 사리에 옳지 않은 일을 많이 저질렀고 함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서 신하들의 신임과 덕망을 얻지 못했다. 사촌인 공손무지가 반란을 일으켜 양공을 죽이고 왕좌를 빼앗았다.

그 이듬해 환공 원년 봄. 무지는 옹림에 갔는데 이 옹림에는 전부터 무지에게 앙심을 품은 자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가 무지를 암살해 버렸다. 그런 다음 제나라 대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지는 군주인 양공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를 빼앗은 역적입니다. 소신은 역적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이제야말로 전 군주이셨던 양공의 아드님 중에서 훌륭한 사람을 맞이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키게 하십시오. 저는 모든 일을 군주가 명령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본래 양공은 지독한 폭군이었다. 노나라 환공이 제나라를 방문했을 때 술에 취하게 하여 죽여 버렸다. 그 이유는 자기가 환공의 아내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공이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죄 없는 신하들을 많이 죽였다. 또한 여자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손을 뻗치고 대신들에게 무안을 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포악했기 때문에 양공의 동생들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로 아래동생인 규는 어머니의 고향인 노나라로 망명했다. 그때 관중(管仲)과 소홀이 시종으로서 따라갔다. 그 뒤를 이어서 그 다음 동생인 소백이 거나라로 망명했다. 소백의 시종으로는 포숙(鮑叔)이 따라갔다.

제나라에서는 무지가 옹림에서 암살을 당한 뒤 누구를 새로운 군주로 세우느냐 하는 의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여파로 소백과 규가 서로 다툼을 벌였다.

소백의 어머니는 위나라 출신으로 지난날의 군주인 이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또한 소백은 소년 때부터 대부인 고혜와 친했다. 그래서 대부 고씨와 국씨가 소백을 몰래 거나라에서 다시 불러오려고 했다.

그와는 반대로 노나라의 규 측에서는 무지가 암살을 당했다는 보고를 듣자 호위군을 딸려서 공자인 규를 제나라로 보내는 한편 별도로 관중에게 군사를 주어 거에서 돌아올 소백을 숨어서 기다리게 했다.

군사를 매복시킨 관중은 소백의 일행이 오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지나가자 화살을 날렸다. 그 화살은 소백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그가 화살을 맞은 곳은 바로 허리띠의 장식이었다. 소백은 일부러 죽은 척했다. 소백을 죽인 줄로 착각한 관중은 곧 노나라로 사자를 보내 소백을 죽였다는 보고를 했다. 안심한 그들 일행은 6일이나 지나서야 제나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소백이 도읍에 돌아와 있었으니, 그는 고혜의 옹립을 받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제나라의 새로운 군주인 환공이었다.

화살을 맞았을 때 소백은 죽은 척함으로써 관중을 속였고 죽음을 가장하여 영구차를 만들어서 길을 서둘러 제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한 계략이 제대로 들어맞은 데다 고씨와 국씨 두 대부가 국내에서 뒷마무리를 용의주도하게 꾸밈으로써 소백(환공)은 규보다 빨리 귀국하여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환공은 즉위하자마자 곧장 출전하여 규의 일행을 국경 밖으로 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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