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주장과 신념을 달리하는 신학자들끼리의 증오심이나 반감을 라틴어로 ‘오디엄 씨올로지캄(Odium theologicum)’이라 한다. 물론 증오심이나 반감, 분노와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아무리 사사로운 주장이나 신념의 대립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기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종교나 종파, 그것에 대한 신념과 이론의 대립만큼 살벌한 적의(敵意)가 번득이는 분야를 찾아보기는 쉽지가 않다. 종교가 표방하는 바는 영혼의 구원을 비롯해 대저 사랑과 박애, 자비, 평등, 평화 등 최고의 숭고한 가치일진대 현실은 정반대로 갈등과 대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올 한 해만이 아니다. 우리의 종교 현실이 끝 모를 ‘오디엄 씨올로지캄’에 빠져 있다고 한들 심한 과장이라 하긴 어렵다.

사람마다 다를 것이긴 해도, 행여 뭔가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새로운 기대로 반갑게 ‘영신(迎新)’했던 한 해가 별 뾰족한 자국을 남기지 않은 채 내빼려하는 연말은 심란(心亂)하기가 이를 데 없다. 솔직히는 세월이 사람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을 경험한 것이 한두 해가 아니어서 ‘영신’이 반가웠다고 말한 것은 정말로 깊은 심중을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저 오라고 부른 것도 아닌데 제 맘대로 오는 해(年)를 거절할 수 없으므로 기왕이면 울상으로 맞이하기보다는 반가운 척이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일 뿐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반갑게 맞이했던 한 해가 뾰족하게 좋은 자국은 남기지 않았으되 끔직한 자국들은 많이도 남겨 놓았다. 그래서 ‘끔직한 한 해(Annus horribilis)’였다. 그런 끔직한 한 해가 나라나 개인들의 정체성과 동질성에 파국(破局)을 안겨주지 않고 비록 겉모습일지라도 온전하게 보존토록 한 것은 한편으로는 ‘기적의 한 해’였음을 말해준다.

올 한 해 우리는 증오의 바다, 갈등의 바다, 대립의 바다를 힘들게 건넌 느낌이다. 종교만이 갈등과 대립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싸움 또한 예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정치는 큰 인물에 의한 중심 역할이 사라짐으로써 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영혼을 의지하는 종교와, 민생을 의존하는 정치는 각자가 지니는 개인과 국민 생활에 대한 향도(嚮導)적인 영향력 때문에 좋은 모습은 좋은 모습대로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되 그들이 보이는 증오와 갈등, 대립은 반대로 너무 강한 오염성(汚染性)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 갈등과 대립이 그로부터 연유되며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정치는 소통과 토론의 과정에서 꼭 조용할 수만은 없는 것이지만 국민이 등을 돌린 지금의 상황은 자신들을 위해서나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뼈를 깎는 특단의 성찰을 필요로 한다.

끔직한 한 해의 서막을 연 것은 너무나 많은 아까운 목숨들을 무참히 앗아간 ‘세월호’ 참사였다. 올해가 유별나게 다사다난하고 ‘이상한 한 해(Annus mirabilis)’가 될 것임을 예고해준 대형사고다. 이 뜻밖의 불행에 유족들이 겪었을 슬픔을 필설로 다 표현할 길은 없다. 그렇지만 그 슬픔과 고통이 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국민 모두의 것이었고 국가의 것이기도 했다. 유족들은 억누르기 어려운 슬픔과 분노 속에서 국가에 대한 책임 규명 요구와 강한 항의 표시를 길게 이어나갔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동조하고 동참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태에 정부도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 자명하다. 한편으로는 전국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활약과 진도 주민들의 헌신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 특유의 면면히 이어오는 살아있는 인정과 상부상조 정신의 발양(發揚)이었다. 국난이나 재난 때 어김없이 자발적으로 발휘돼온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저력이며 국민정신이고 자랑스러운 전통인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여진(餘震)이 봄 여름 가을이 다 가도록 길게 이어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민생 등 제(諸) 분야의 분위기를 무겁고 우울하게 짓눌러 피로감이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처럼 고통이 확산되고 지연되도록 방치된 것은 큰일을 당했을 때 발휘돼야 할 사회적 ‘공동 치유(healing) 역량’을 우리가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함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 된다. 그 사회적 공동 치유의 제1차적 소임은 정치권에 있는 것이지만 그들은 유족들과 국민의 애로를 수렴하기는커녕 여야가 줏대 없는 정파적 이익으로 갈려 공연한 싸움질로 세월을 보냄으로써 고통과 슬픔의 원만한 조기 수습을 이루어내는 데 실패했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유족과 정부가 싸우고 정부와 국회가 싸우고 국민끼리도 그 일로 다투고 시민단체들도 패가 갈려 싸우느라 소모적으로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비단 세월호 문제에서만 나타난 우리 사회의 고질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히 크든 작든 무슨 문제만 생기면 해결을 위해 힘을 보태기보다 먼저 싸움부터 시작하는 습성이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 전체에 이 같은 ‘오디엄 씨올로지캄’과 같은 증오와 반감, 대립과 갈등이 추방되지 않는 한 진정한 사회 평화와 국민 모두의 행복은 찾아지기 어렵다.

올 한 해가 유별나게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뭔가 다툼으로 인한 소란이 불쑥 불쑥 생겨나 마지막 12월까지 나라가 소란한 점이다. 이제는 청와대 문건 파동이 화근이다. 무슨 권력의 ‘비선’ ‘실세’ ‘3인방’ ‘십상시’ 어쩌고 하는 것들의 국정 개입 시비의 진위를 가린다고 나라가 들썩거린다. 그런 소란에 더해 언론사를 상대로 한 보기 드문 정부의 고발 고소가 줄을 잇는다. 말하자면 정부와 언론이 맞붙어 싸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에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해를 가하는 잘못이 아닌 이상 권력이 언론을 상대로 이렇게 싸우는 것은 옳은 일도 좋은 일도 아니다. 민심을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할 때 고발 고소는 그 수단이 되기에는 가장 하책(下策)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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