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가 벌써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 참화와 재앙은 지금에도 이어져 온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첨예한 군사적 대치와 간간이 벌어지는 무력 충돌, 비운의 국토분단과,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단장의 슬픔을 씹어야 하는 이산가족들이 그것들이다. 휴전선 상의 대치 무력은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뒤늦게 남 탓을 해 무엇하리요마는 전쟁 6개월 전인 1950년 1월 20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의 그 ‘경망한 발언’만 없었더라도 북의 김일성은 무력도발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애치슨은 미 상원 비밀 청문회에 나가 ‘미국의 극동 방어선은 일본의 오키나와에서 필리핀을 잇는 선(Line)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그 ‘경망한 발언’이다. 이른바 ‘애치슨라인 선언(Acheson's line declaration)’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빠졌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최악의 소식이었지만 남침 전쟁 준비를 끝낸 김일성에게는 더 이상 고무적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타이밍도 김일성에게 그렇게 절묘할 수가 있는가. 당초는 비밀 증언이었으나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전격 공개함으로써 피아(彼我) 간에 ‘핫뉴스(hot news)’로서 긴급하게 전파되게 되었다.

두 말할 것 없이 이 경망하고 헤픈 애치슨의 말 한 마디는 6개월 뒤 한국전쟁이란 경천동지할 불행하고 험한 메아리(echo)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와 쓰나미(tsunami)처럼 덮친다.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에게도 미국에게도 세계의 자유 우방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만 같다면야 우리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그런 발언이 이 지구상 어느 나라 누구로부터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때의 미국은 우리의 빈약한 처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익이 별 것 아니라고 봤기에 우리를 그처럼 함부로 대할 수 있었으며 애치슨 선언에 대한 한국 정부의 사후 항의에 대해서도 미국의 조야(朝野)가 대체로 일관되게 냉담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런 미국이 참전을 위해 신속히 움직인 것은 경망한 발언으로 일단 일을 그르치고 때는 이미 늦었더라도, 아주 늦지 않게 아차 실수를 깨달은 결과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그것은 소련 대표가 불참함으로써 거부권 행사가 없어 유엔군의 참전이 결정된 안보리 결의와 함께 기적에 가깝다.

개전 초기 김일성 군의 진군 속도는 파죽지세였다. 그런 기세라면 3주 안에 남한 전역을 손 안에 집어넣고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했던 그의 생각보다도 전쟁이 더 빨리 끝날 것만 같았다. 낙동강 전선까지는 그런 기세로 거칠 것 없이 밀고 내려갔다. 하지만 거기서부터의 전쟁은 그들 맘대로가 아니었다. 전열을 정비한 국군은 초기의 뒤로만 물러서는 혼비백산한 군대가 아니라 완강하게 그들과 맞서며 타격을 가했다. 전선의 교착상태로 시간을 벌게 됨에 따라 미군과 유엔군의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들이 그들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무한정 부산항으로 양륙돼 쌓이는데다가 전선으로 이동돼 사용되기 시작함으로써 김일성 군의 패색은 점점 더 짙어갔다.

급기야 전쟁 개시 두 달 20여일 만인 1950년 9월 15일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양동작전(feint operation) 끝에 맥아더 원수의 지휘에 의한 상륙작전이 적이 오판한 인천을 택해 전격 전개됨으로써 적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김일성 군은 평양에서 낙동강까지 길게 늘어진 병참선의 허리가 잘리게 돼 전쟁이 불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은 그들 전투력의 예봉과 주력이 집중된 주공(主攻) 낙동강 전선의 배후가 차단되고 공격당한 것을 의미하므로 주공 전선의 와해가 촉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김일성 군은 사실상 전쟁의지를 상실하고 혼비백산 북쪽을 향해 내빼기에 바빴으며 그마저 힘이 들었다. 적은 언제 어디서 벌어지게 될지는 몰랐지만 중공 주석 마오쩌뚱이 맥아더 군의 상륙작전을 경계하라고 경고했을 만큼 기필코 상륙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작전명 ‘블루 하츠(Blue Hearts)’란 이름으로 사실은 일찍이 7월 초순부터 도쿄 사령부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해왔으며 병력을 동원해 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작전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9월 5일부터는 실제 상륙지를 숨기기 위한 양동작전에 들어가 평양 인천 군산을 차례로 폭격하기도 하고 9월 12일에는 미국 영국 혼성부대로 하여금 군산을 공격하게 하기도 했다. 작전 하루 전과 당일에는 성동격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동해안 삼척 일대를 사납게 폭격하면서 이윽고 심한 간만의 차로 상륙이 어렵다고 오판한 인천을 택해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세계 전사에 빛나는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의 막을 올렸다. 전함 261척에 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된 상륙군 7만여명을 동원한 가운데였다.

상륙작전 성공 후 국군과 미군의 진격을 막을 적은 더는 이 땅에 없었다. 유엔군은 무서운 기세로 쫓기는 적을 북으로, 북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드디어 10월 1일 38선을 돌파 북진을 시작했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합참의 유보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맥아더의 판단과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했으며 그 다음 날 맥아더가 평양에 날아와 미군을 더 멀리 북쪽으로 진격시켜야겠다는 결심과 그래도 좋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은 후 다시 도쿄로 돌아갔다. 맥아더의 이 같은 판단은 불패의 성공신화에 빠진 사람이 말기에 흔히 보이는 자만에 의한 것임이 곧 드러난다. 미군의 북진은 중공 수상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누차 경고한 중공군의 개입을 불렀으며 국군과 미군의 진격이 한만(韓滿) 국경에 이를 즈음 30여만의 대병력을 은밀히 평안도와 함경도 산악에 숨겨놓게 된다.

이 때문에 국군과 미군은 이 덫에 걸려 뉴욕 타임스의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기자가 6.25 전쟁을 다룬 자신의 저서 ‘더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서 말한 대로 미군은 중공군보다도 더 무서운 한국의 ‘가장 추운 겨울’과 운명의 치명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장진호 전투에서 그들은 그러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