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구한말 역사의 격랑에 휩싸인 1894년 12월 12일 사상 최초의 헌법 성격을 띤 최고 규범이 제정됐다. 이듬해 1월 7일 고종이 선포한 홍범 14조. ‘홍범’은 중국 서경 주서 홍범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큰 원리라는 뜻이다. 이는 탐관오리의 부패와 사회혼란, 외세간섭, 국론분열로 민중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독립국가로서의 출발을 선언한 것으로 그 역사적 함의가 크다. 헌법적 성격을 띤 선언이었지만,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지구촌 10대 강국 한국은 어떤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우리의 법치의식은 턱없이 낮기만 하지 않은가.

“권력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 입법 행정 사법 등 사회 전반에 상의하달에 급급한 관료제의 폐해가 심하고 권한의 민주적 위임이 안돼 민심 이반이 심각하다. 남북 분단 상황이 근 70년 가까이 고착돼 통일은커녕 남북교류협력의 돌파구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 일부 재벌과 권력층, 금융권에 부가 편중된 반면, 서민은 물가고 등으로 극심한 곤란을 겪는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믿는 화이트칼라마저 경제적으로 무너지면서 가공할 교육비 등의 부담으로 출산을 꺼리고 자녀가 부모 노후를 외면하는 사회병리가 만연되고 있다. 법치주의와 사법정의는 허울 좋은 형식에 치우쳐 유전무죄·무전유죄 등으로 상대적 박탈감만 크다. 국회는 비민주적이고 비전문적인 패거리정치로 일관해 국민 불만이 폭발직전이다. 정치권, 관피아, 사정기관의 집단이기주의가 망국적 상황에 있다.…”

세간에 들리는 우려의 목소리들을 요약해 기술해 보았다. 쉽게 말해 세상이 ‘법대로’ 잘 돌아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통일대박’을 위해서라도, 법을 일반국민의 것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라도 개헌이 필요하지 않은가.

정치권 인사들의 언급을 보자. 개헌을 멀쩡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헌법에 대한 인위적인 칼질 정도로 폄하하는 단견이 보인다. 물론 권력구조도 검토해봐야 한다. 하지만 어느 당파에 유리한 인위적 권력구조 개편 같은 것으로만 인식하며 덧셈 뺄셈에 안주하는 어처구니없음에 기가 막힌다. 그런 가운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이가 비교적 문제의 핵심에 근접한 느낌이다. 김 대표는 “무능한 대통령에게 5년은 너무나 길고, 유능한 대통령에게는 5년이 너무 짧다”고 말했다. 참 간단명료하면서도 정곡을 찌른 말 아닌가. 김 대표는 이원집정부제는 권력구조 문제의 하나로 얘기를 꺼냈지만 말꼬리가 잘려 와전됐다고 한다. 박원순 시장도 “4년 중임 대통령제에 찬성하는 편”이라며 “5년 단임제로 헌법이 개정된 1987년 체제를 이제는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경기도 지사를 지낸 새누리당 김문수 혁신위원장은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고 싶어 한다며 개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은 ‘선(先) 선거제도 개편, 후(後) 개헌’의 입장을 내비쳤다. 홍준표 경남지사도 집권초가 아니므로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60년간 불임상태에 있는 일본헌법처럼 1987년 한국 헌법도 ‘불임헌법’이다. 8차 개정헌법은 전두환 정권 말미에 당시 군부와 3김이 낙선 시 차기를 도모하기 위한 장치로 5년 단임제를 합의한 것 아닌가. 유신 이후 15년 만에 직선제로 바꿨지만 정치체제의 불균형과 비효율이라는 본질적인 흠결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안보논리 등에 바탕한 미성숙 권력집중형 전근대적 헌법임에도 불구하고 토씨 하나 못 바꾸고 우리 국민이 이를 그대로 안고 살다 후대에 그대로 물려줘야 하는가 말이다.

여기서 헌법개정자문위원회가 마련한 분권형 헌법 개정시안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은 입법부를 양원제로 해 입법권력을 나눈다. 행정부도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력을 분점해 한 편의 독주를 막도록 하고 있다. 국민적 정서를 감안,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뽑고,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절차를 거친다. 중앙정부가 행정권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시스템을 바꿔 분권을 도모해 지역균형, 지방자치의 발전을 견인하도록 했다. 사법부도 독립성과 민주성을 강화하고, 참정권 등 기본권을 글로벌 기준에 맞게 보완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사정기관인 감사원도 독립시켜야 하며, 국회의원 등 공직자에 대한 국민소환제를 보완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업그레이드시켜야 할 게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다. 다만 개헌을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로 악용한다면 그 개인이나 집단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는데,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가. 칼자루를 쥔 권력자들의 인식 개선이 없다면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적어도 불신과 갈등과 분열로 온 나라가 갈기갈기 찢겨진 현재와 같은 위기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으뜸 과제로라도 당당하게 분권형 개헌을 공론테이블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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