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배가 왔다. 그런데 일단 귀부터 의심케 한다. 그 배가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 그렇다면 이제 5.24조치는 해제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간접투자방식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사실상 현금이 북한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시베리아산 유연탄을 실은 중국화물선이 포항에 도착한 것이 지난 주말. 남북한과 러시아 3국간 물류협력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첫 시범사업이다. 이 사업은 북한의 자유무역항인 나진과 러시아의 하산을 잇는 54㎞의 철로를 개보수하고, 나진항 3호 부두를 현대화하는 두 사업을 축으로 하고 있다. 북한과 러시아가 합작회사를 설립한 것은 2008년. 그 후 철로 개보수와 부두 현대화 작업이 완료됐다. 철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바로 연결된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한반도종단철도(TKR)가 나진을 거쳐 TSR과 이어지면 향후 유럽과 동북아를 연결하는 ‘철(鐵)의 실크로드’가 현실화될 수 있다. 운임절감과 경제협력에 나진항이 기여하는 역할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 프로젝트는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유라시아 이니시어티브’의 간판사업으로 우리 기업들의 대북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부는 간접투자 방식이므로 현금이 북한에 들어가도 5.24조치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5.24조치의 예외라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당당하게 5.24조치를 해제하고 남북협력을 공개 추진하는 것이 어떨까. 현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정책 중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은 버리고 떼내거나 보완해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 당시 정책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입었던 옷이 지금 몸에, 시대에 맞지 않다면 대폭 수선해 착용하거나 (물물교환 바자회 혹은 불우이웃돕기 단체에 기증하거나) 내다버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가 침체 일로를 걷고 있지 않는가. 돌파구 마련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여기에 눈여겨봐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북극곰 변수’이다. 중국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북한 지하자원이었지만 이젠 러시아가 끼어들었다. 러시아는 북한 철도 현대화 사업의 대가로 희토류 등 북한산 광물자원 채굴권을 사업비 대신 받아냈다. 그간 북한에 대한 권리를 놓고 중국과 미국 일본이 경쟁하듯 북한과 물밑협상을 벌였던 상황. 그러나 러시아에 모두 허를 찔렀다. 한국, 미국은 물론 중국도 몰랐다. 6.25 한국전쟁 때 북한의 배후 역할을 한 러시아이다. 최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서를 휴대한 최룡해 당 비서의 러시아 방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푸틴-김정은’의 밀월관계와 신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이다. 이렇게 손잡을 줄은 아무도 예상 못한 것 같다. 다들 북한이 결국 핵을 포기하거나 붕괴될 것이라고만 예상한 것일까. 미국의 동아시아 영향력 확장에 푸틴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중국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나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억측이라고 하겠지만 상상력을 더 발휘해보자. 혹시라도 ‘북한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압박에 러시아가 외면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김정은 정권을 지켜주기 위해 대규모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러시아 군대의 북한 주둔이라도 검토하겠다’고까지 한 것은 아닐까. 열강의 각축,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마치 구한말과 흡사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가 ‘북핵, 북핵…’을 외치는 사이에 ‘북극곰’이 먹이를 가로채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북한핵문제를 장기과제로 돌리고 과감하게 5.24조치는 해제한 후 본격적인 남북경협에 나서야 할 때인 것은 아닐까. 때를 놓쳐서는 안될 텐데.

박근혜 대통령이 연초 ‘통일대박’을 언급한 후 1년이 다 돼 간다. 그러나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너무 더디다. ‘옥상옥’이라는 논란에다 구성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통일준비위원회가 발족됐지만 임팩트도 없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윗분’ 눈치만 살피는 것 같다. ‘정책 제언은 하지 않는다’느니 ‘중장기과제만 다룬다’느니 하고 있다. 이것은 논의할 수 있고, 저것은 논의할 수 없다는 식이다. 2차 남북고위급회담이 무산된 가운데 2일 열린 3차 회의에도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난세에 제갈공명이나 키신저가 했던 것과 같은 귀가 쫑긋한 메시지가 회의 후 나오지는 않은 것 같다. 통일과 남북화해 협력 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아낌없이 아이디어를 모아 이 정권에 던져야 한다. 활기 없는 우리 경제의 숨통을 트기 위해서라도 북방정책을 펼쳐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고 시베리아에 진출하고 유럽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티브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어젠다를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로 되뇌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말자. 내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가 아닌가. 남북한의 신년사라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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