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한반도에 유입돼 정착한 지 1세기가 넘지만 화합을 이뤄내지 못했고 초기 유입 당시에는 마찰이 심했다. 1894년 건립된 명동대성당(구 종현성당)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곳으로 상징성을 갖는다. 사진은 지난 부활절 미사 모습(왼쪽).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로 알려진 새문안교회(구 정동장로교회)에서 지난 2013년 에큐메니칼 진영 각 교단들이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를 개최했다(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100년 앞서 한반도 찾은 천주교
조선 박해에 순교자만 1800여명

개신교, 개방화 물결에 포교 ‘순항’
1907년 부흥 바람타고 폭발적 성장

교세 역전 속 교인단속… 교리 반박
‘그리스도인 일치’ 아직 갈 길 멀어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마치 물과 기름 같았다. 예수라는 한 뿌리로 시작됐음에도 하나가 되지 못한 천주교와 개신교 얘기이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국내 유입 당시부터 마찰이 잦았고, 이후에도 함께하기 껄끄러운 상대로 인식돼왔다.

 

예수로 시작해 피를 나눈, 형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신교이지만 오히려 전혀 성격이 다른 종교보다 천주교 교인들에게 더 비호감을 샀다.

2007년 천주교 내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보다 불교에 더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개신교 활동에 대한 호감도는 1987년 32.6%에서 2006년 30.5%로 감소했지만, 불교 활동에 대한 호감도는 같은 기간 32%에서 50.3%로 대폭 증가했다.개신교 내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했다.

지난 5월 한국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 화합의 창구가 생겼다. 지난 47년 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가 교류한 결실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한국신앙직제)’가 창립된 것. 이들은 그동안 공동번역성서를 간행하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한 운동을 벌이는 등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교계 및 사회 여론은 앞 다퉈 환영했다. 그러나 개신교 일각에서는 비난이 일었다. 급기야 한국신앙직제 창립식이 열린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앞에서는 규탄 집회가 열렸다. ‘로마가톨릭&교황정체알리기운동연대(조직위원장 송춘길 목사)’ 회원들은 “부패한 천주교의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탄생했다”며 한국신앙직제 창립은 물론 천주교를 반대했다. 이들은 지난달 광주에서도 같은 성격의 집회를 열었고, 급기야 오는 12일에도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엇갈린 운명은 언제 시작됐을까.

◆박해 받은 천주교, 환영 받은 개신교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는 유입 당시부터 관계가 좋지 못했다. 사실상 개신교는 천주교의 부패상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켜 탄생했기 때문에 태생부터가 좋은 관계를 갖기 어려운 구조였다. 국내에 유입될 당시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먼저 국내에 발을 들인 것은 천주교다. 18세기 초 유입된 천주교는 조선 학자들에게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1785년 첫 박해가 시작됐다. 초기 천주교는 각 지역에 본당을 세워 교세 정착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조선 관리와 주민들의 경계만 받게 됐다. 이후 100여 년 동안 박해가 이어졌고, 박해과정에서 순교한 사람은 1800여 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개신교는 19세기 후반 개방화 물결을 타고 순적한 포교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일부 선교사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엔 서양 문물을 들고 들어왔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석탄, 석유, 농기구 등을 수입했으며, 빈론 선교사는 재봉틀을 수입했다. 이처럼 개방화 물결에 발맞춘 선교기법으로 국내에 빠른 속도로 정착했다. 특히 부흥운동이 활발했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은 개신교에 폭발적인 성장률을 가져다줬다.

◆반목과 질시로 얼룩진 ‘교세 싸움’

▲ 천주교 교리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개신교 교리를 비교해 반증한 책인 ‘예수진교 패(오른쪽)’와 천주교 교리를 담은 ‘천주교요리’. (이미지출처: 한옥션 경매 홈페이지)
100여 년이나 빨리 한반도를 밟았지만 천주교 보다 개신교의 성장이 더 빨랐던 것. 이에 개신교가 유입될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는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894년 3월 26일 종현성당(현 명동대성당) 신축현장에서 천주교 관계자와 개신교 신자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 개신교 신자가 다친 사건이다. 개신교 아펜젤러 선교사는 ‘마귀의 종’이라는 내용을 포함한 항의 서한을 보냈고 논란이 됐다.

이 외에도 해서교안에는 여러 마찰 건들이 보고됐다. 1901년 7월 장연교안, 1901년 신환포교안, 1902년 신환포교안, 이승혁 우질사건 등이다. 교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당 건립 또는 교당 사용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다.

교안은 한국‧중국‧일본 등에서 기독교로 말미암은 모든 분쟁과 관련해 서구 열강과의 가진 외교적 교섭을 가리킨다. 1907년 개신교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뤘을 당시에는 서로에 대한 경계가 더욱 치열했다. 천주교는 ‘예수진교패’라는 책을 간행하고 천주교 교리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개신교 교리를 비교해 반증했다. 개신교는 이에 맞서 1908년 개신교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천주교를 비판하기 위한 책인 ‘예수텬쥬량교변론’을 정동교회에서 처음 발행했다.

◆“진보·보수 아우르는 것, 종교지도자 몫”

이 같은 불협화음 속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각각의 길을 걸어가며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986년 한국정교회, 한국천주교회, NCCK 및 회원교단들이 일치기도회를 시작으로 조금씩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부터는 ‘한국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을 조직했고, 2012년부터는 한국교회에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한국신앙직제 창립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양 종단의 진보와 보수측을 아우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제기독교 선교협의회 이기철 총재는 “진보 측의 연합‧일치 운동이 보수 측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종교지도자들의 행동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4대 종단 지도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행동은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교황 방문과 관련해서는 “개신교 보수 측을 아우르려면 이번 방한 때에 교황이 천주교가 초기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를 핍박했던 것에 대해서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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